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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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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통한 자신감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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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마상진
KREI 논단| 2008년 01월 03일
마 상 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빈곤에 대한 책을 저술하던 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8년째 복역중이던 한 여죄수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나요?”라는 다소 판에 박힌 듯한 질문에, 20대 초반의 그 여 죄수는 “그야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즐기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한다. 그는 정신적 삶이 종교적인 것을 뜻하겠거니 생각하고, 정신적 삶이 뭐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극장이나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 말이에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짧은 대화는 빈곤을 연구하던 한 학자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돈과 빵일지 모르지만, 정말 긴요한 것은 자존감의 회복임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 자존감의 회복은 중산층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극장이나 연주회, 박물관과 강연과 같은 살아있는 인문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문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되돌아보며, 깊이있게 사고하는 법, 현명하게 판단하는 법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미국의 언론인이며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Earl Shorris)는 1995년 노숙자, 빈민, 마약중독자 죄수 등을 대상으로 정규 대학 수준의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Clement Course)’를 만들었다. 재원과 강사 그리고 학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뜻을 같이하는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최고 수준의 교수진들을 모았고, 약물중독자 재활센터를 돌며, 약물중독자, 매춘부, 노숙자 등을 중심으로 31명의 학생을 모집한다. 그리고 딱딱하고 어려운 강의 대신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이용해 참여자들과 토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활훈련을 시켜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존의 빈민 구제 프로그램과는 달리 철학과 시, 미술사, 논리학, 역사 등 인문학 강의를 통해 정신과 영혼의 힘을 회복하고, 진정한 재활의지를 갖게 하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최초 참여자 31명 중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여했고 이중 14명은 뉴욕 바드 대학의 심사를 거쳐 정식 학점을 취득했고, 이중 2명은 나중에 치과 의사가 되었으며, 전과자였던 1명은 약물중독자 상담실장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참가자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얼 쇼리스는 말한다. “빈민은 열악한 환경과 불운이라는 포위망에 둘러싸인 사람들입니다. 포위망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존을 위한 즉각적인 대응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즉각적인 대응 대신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삶이 달라집니다. 인문학을 통해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사고를 시작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클레멘트 코스를 통한 인문학 교육의 목적입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농업인 대학이 유행하고 있다. 1999년 강화에서 시작되어 2007년 현재 47개 대학이 운영 중이다. 지자체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농업인 대학에서는 작목 중심의 전공 강좌와 더불어 일반 대학과 같이 교양 강좌도 제공하고, MT와 방학도 있고 졸업식을 통해 지자체장이 학위증도 수여한다. 농업인 대학이 농업인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기존의 농업인들이 주로 받아오던 반복적인 내용의 일회성 교육이 아닌, 1년이라는 비교적 장기간 동안 작목 중심의 수준 높은 농업 교육을 제공하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무엇보다 농업인 대학이 농업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농업에서 벗어나 농업 이외 삶의 다양한 생각할 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농림부나 기타 농업 관련 기관을 통해 농업인들에게 제공되던 교육 프로그램은 대부분 이들의 신기술 습득, 경영 능력 제고 등 농업과 관련한 전문성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이 농업인들이 도전적인 환경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느라 지쳐있는 시기에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교육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찌들어온 경제적 삶이 아닌 농업이외의 다른 것, 즉 중산층 도시민들이 즐기는 교양적 삶, 인문학의 경험이 아닐까? 지금이야 말로 농업인들이 직업적 삶으로서 농업의 의미를 돌아보고,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농업계의 클레멘트 코스가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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