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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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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과 국제개발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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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허장
KREI 논단 |  2013년 5월 24일 
허   장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새 정부 들어서 새마을운동이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더욱’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새 정부 출범 이전에 새마을운동은 이미 해외로부터 각광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88올림픽 등과 더불어 새마을운동이 우리 국민들에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손꼽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새마을운동이 민간주도로 전환된 이후 그 수장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를 가릴 것 없이 세계 각지에서 한국의 발전을 뒷받침한 원동력으로 각광을 받아 온 지  꽤 오래 되었다.

 

  1973년부터 2011년까지 새마을운동중앙회 연수원에 새마을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은 107개국 2만 4,119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몽골, 네팔,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새마을회가 조직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의 ‘신농어촌건설운동’, 베트남의 ‘2011-2020 신농촌을 위한 국가목표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여 자국의 농촌발전 전략으로 채택한 사례라고 한다.

 

  이러한 해외의 수요에 부응하여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에서는 다양한 새마을운동 관련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외교부는 KOICA를 통해, 안전행정부의 국제행정발전지원센터는 새마을운동중앙회와의 ‘지구촌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리고 경상북도는 ‘밀레니엄 빌리지 사업(MVP)’을 통해 전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지식공유사업(KSP)의 개발경험 모듈화사업을 통해 새마을운동의 대외 경험전수 콘텐츠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역시 농촌종합개발의 한 부분으로 마을개발에 새마을운동의 요소를 가미하여 다양한 컨설팅, 시범사업을 시행해 왔다.

 

  국무총리실은 새마을운동을 중구난방 해외로 ‘수출’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 따라 2011년 각 부처가 실시하는 새마을운동 전수사업을 평가한 뒤, 경상북도와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새마을운동 세계화 사업’으로 역량강화 및 소규모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외교부(KOICA)의 ODA 사업으로 연계하는 부처 간 협업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으로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

 

  저개발국에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왜 ‘배우고’ 싶어 할까? 필자는 1970년대 초반 하루 1달러 미만의 국민소득 국가가 40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 선 경이로운 성장과 발전의 비결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한다. 자기들도 그 비결을 터득해서 농촌과 농업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현지견학에 나설 것이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한 일을 배우겠다고 하니 뿌듯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새마을운동을 배워서 우리처럼 자기네 나라 발전정책으로 채택하라고 할 만큼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잘 알고 있는 것일까.

 

  1970년대 대통령의 무소불위의 리더십으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그 당시 농림부를 비롯한 각 정부부처가 이미 수행하고 있었던 소득 개발, 생산기반 정비, 복지환경 개선 등의 사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새마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추진하게 된다. 많은 국가사업이 새마을사업으로 추진되고 이에 따라 추진된 사업의 성과는 새마을운동의 성과로 드러나게 된다. 1950년대부터 있어온 마을 내 조직이 모두 새마을노인회, 새마을부녀회 등이 된 것도 그러한 맥락과 상통한다.

 

  대통령이 새마을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지었다고 하니 새마을운동에 대한 최고지도자의 관심은 말할 나위가 없다. 새마을운동은 정치적으로 통치 모토로 확장되었으며 1970년대를 지배한 사회적 동원의 슬로건이었다. 새마을지도자는 장관도 바로 만날 수 있었으며, 새마을운동은 도시, 직장, 공장으로 퍼져나갔다. 최고지도자가 교체되어 1980년대 민간으로 이관될 때까지 모든 국정을 아우르는 열쇳말이었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농촌에 존재하던 계, 두레, 대동계 등은 주민과 마을공동체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어 함께 해결하는 전통적 기제로서 오랫동안 작동해 왔으며, 새마을운동에서의 주민 동원과 협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혈연 중심으로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사회에서는 지역개발을 위한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어 있었고, 새마을운동은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과 주민들의 동원에 이를 활용하였다. 상호경쟁 결과에 기초한 인센티브와 지도자에 대한 심리적 보상, 깃발과 노래 등 다양한 수사는 그 활용을 위한 방식들이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을 어떻게 전수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1970년대 초 한국의 특수한 시간적, 공간적 여건을 새마을운동의 시작과 과정, 결과와 연계시키지 않으면 새마을운동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새마을운동은 그러한 구체적 역사 속에서 존재했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의 발전 비결로서의 새마을운동의 추상적인 성공요인에만 관심을 가진다. 물론 그것을 그들이 속한 나라의 구체성에 맞게 적용시키는 것은 여기서 새마을운동을 ‘배워 간’ 사람들의 몫이겠지만, 자칫하면 이들이 추상적 모델과 구체적 현실 사이에서 쉽게 좌절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로서는 우리의 경험을 배우러 온다고 하니 뿌듯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도 구체적 역사 속에서 새마을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리하여 보여 주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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