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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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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에서 먼저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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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KREI 논단 | 2015년 2월 13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 수는 공식적으로 2만 3,000명을 넘는다. 2004년에 33명으로 시작해서, 근년에는 한해에 6,000명씩 입국하고 있다. 대략 추산하면, 우리나라 전체의 농업 노동 투입 시간 중에 외국인 노동자가 기여하는 몫은 5%를 넘는다. 투입되는 농업 노동의 80%가 가족 노동, 5%가 품앗이 또는 일손돕기, 15%가 고용 노동이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게 농업 고용 노동의 30% 이상을 의존하는 셈이다. 농업 생산에서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해졌다. 그런데 이역만리(異域萬里) 타지에서 땀 흘리며 우리 밥상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이들의 곤경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는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가 겪는 부당 노동 행위,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폭행이나 성폭력 등 기본권 침해 사례들이 빼곡하다. 월평균 휴일 수가 2.1일, 월평균 근무시간이 283.7시간, 최저임금법이 정한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이가 71.1%였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는 채 원래 고용된 사업장이 아닌 다른 곳에 불법 송출되어 일한 경험자가 60.9%였다. 그들의 67.7%가 컨테이너나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가건물에 거주하는데, 욕실과 침실에 잠금장치조차 설치해 주지 않은 경우가 44.7%였다. 차마, 거론하기 민망한 통계도 있다. 여성 이주 노동자 가운데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30.8%), 신분증을 고용주가 강제로 빼앗았다는 응답(15.5%), 부당한 처우에 항의했더니 해고・이탈신고・추방 등을 빌미로 협박을 당했다는 응답(47.2%)도 많았다.
 

농업 경영주들은 농산물 가격의 하방 압력은 거세지고 노임은 계속 오르는 힘겨운 여건에 맞서 왔다. 부당 노동 행위를 해서라도 경영 수지를 맞추려는 일부 농업 고용주의 행태가 현재의 사태를 일정 부분 설명해 준다. 그러나 경영 여건 악화를 이유로 부당 노동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른 많은 농업 경영주가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며 고용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사태의 원인을 일부 악덕 고용주 탓으로 돌려 비난하는 것도 문제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우선 법률과 제도의 불비(不備)를 찾아 고쳐야 한다.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실태를 개선하려면 “근로기준법” 제63조를 철폐하거나 개정해야 한다. 이 조항은 우리가 ‘주 40시간, 하루 8시간 근무 원칙’이라고 아는 근로시간 제한 규정을 농림어업 분야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1953년에 법이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주 농업 노동자가 월 300시간 가까이 일해도 ‘합법적’일 수 있는 근거다. 초과근로 및 휴일근로에 대한 가산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례의 근거다. 입법 당시 이 조항의 취지는 농림어업 노동자의 경우 노동시간이나 휴일을 산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지, 농업 노동자에게 쉼 없이 일을 시킬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이주 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다. 농업에서는 노동 소요의 계절 진폭이 크다. 상시 고용 노동자의 비자발적 실업이 발생하기 쉽다. 그런데 법률은 고용주의 승인 없는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현실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 일터에 강제로 불법 송출되어 일하게 만드는 배경으로도 작용한다. 이는 “직업안정법”이나 “파견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도 위반하는 것인데, 정부 당국이 제대로 감독하고 점검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농업 분야에 한해 예외를 허용하는 ‘근무처 추가 제도’가 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 법제의 공백을 채워야 한다.
 

법제를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느냐는 의심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갑을관계’의 무한연쇄라는 늪에 빠지기 직전인 한국 사회에서, 합리적인 법제와 그것을 따르는 준법 행위는 사회적 인정(認定) 관계의 최저선이다. 최근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전에 스탭들과의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당연한 일인데 이목을 끈 것은, 변변한 근로계약 없이 일을 시키던 부당 노동의 관행을 끊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겠지만, 외국인 이주 농업 노동자 문제에서도 그런 종류의 변화가 필요하다.
 

법제 정비 외에 고용주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관련 법규나 인권에 대한 농업 분야 고용주들의 이해(理解)가 매우 부족하다. 사업주와 이주 노동자가 함께 앉은 자리에서 근로계약서를 놓고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알게끔 하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농업계 및 시민사회의 관심과 행동도 절실하다.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이나 해결 방안을 찾는 토론회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실험하는 노력도 있으면 좋겠다. 가령, 노동력이 필요하면서 선의(善意)를 지닌 농업인들이 영농조합법인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농장을 얼마든지 운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가?
 

사회가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곳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약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기본이다. 오늘 농업계의 약자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다. 쉼 없이 일하는 농기계에 이름은 없다. 대신, 감가상각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 회사 앞 식당에서 사 먹은 매운탕에 얹힌 미나리와 쑥갓, 그의 아들이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먹은 방울토마토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땀과 눈물이 섞인 결실이리라. 그들을 농업경영장부의 인건비로 기억할 텐가, 농부의 얼굴로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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