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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씨앗을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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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7년 5월 5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옛말에 ‘농민은 굶어 죽어도 씨앗 오쟁이를 베고 죽는다’고 했다. 농민에게 씨앗은 목숨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농사를 직접 짓지 않는 나는 ‘목숨만큼 소중한 씨앗’이라는 말을 체감하지 못한다. 돈만 있으면 온갖 먹을거리를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농업은 단순히 끝나는 생산이 아니라 순환하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예술임을 모르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씨앗의 소중함을 알기가 쉽지는 않다.
 

종자회사 좌지우지, 선택권 제한

그리고 산업화된 농업에서 농업인은 그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자’라고만 규정되기 쉽다. 농축산물을 생산하는 노동과정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종사자’라고만 이해된다.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산업화된 농업의 전형적인 사례로, 축산물 가공 판매 및 사료 제조업 부문 대기업에 닭을 납품하는 수직계열화된 구조 속의 양계 농가를 살펴보자. 양계 농가는 본사로부터 병아리를 공급받는다. 사료도 공급받고 양계장 시설을 갖출 자금도 융자받고, (양계 농가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라 본사에서) 정해진 축종의 닭을 정해진 기간 동안 키워낸다. 그 대가로 돈을 받는데, 그 돈을 ‘사육 수수료’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소개한 책의 저자가 되묻는다. “한 해에 도축되는 닭은 약 8억 마리에 이르고, 그중 절반 이상은 치킨으로 튀겨 먹고 있다. 치킨을 그렇게 많이 먹어대고 있지만 정작 닭은 누가 키우는지 헷갈린다. 육계회사가 키우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닭똥 치워가며 양계장에서 일하는 양계 농민이 키우는 것인가?”(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 분명히 양계 농민이 닭을 키우기는 하는데, 왜 ‘누가 닭을 키우는지 헷갈린다’고 할까? 식물이나 동물을 키우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농민’을 규정하는 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키우되 자율적인 선택과 노력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야 온전한 의미에서 ‘농민’이라고 할 수 있다.
 

씨앗 지키는 게 농민 자율성 회복

즉, 농업 노동과정에서 자율성을 지닌 주체라야 ‘농민’이다. 이때의 자율성이란 무엇일까? ‘사육 수수료’ 또는 ‘재배 수수료’가 주된 소득이라면, 그 사람은 농업 노동자일 수 있지만 농민이기는 어렵다. ‘농민의 자율성’ 개념 속에는 농사에 소용되는 것들을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라 농민 스스로의 능력으로 확보하고 영농의 순환 과정 안에서 재생산하고 발전시키는 실천이 포함된다. ‘종자-씨앗’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내가 농사지은 것으로 내년 농사에 쓸 종자를 얻지 못한다면, 돈을 주고 종자를 사야 한다. 그 자체로 경제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종자 회사에 품종 선택권을 넘겨주는 꼴이 되므로 그만큼 자율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 요즘엔 다들 돈 주고 종자를, 아니 모종을 사서 농사를 짓지 씨를 받아 농사짓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들이나 씨를 받는다. 젊은 농업인 중에는 씨를 받아 보관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결국, 아주 오래 전부터 재배되었던 토종 종자는 종자회사 카탈로그에서 퇴출된 지 오래인데, 머지않아 농장에서도 퇴출될 것이다.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선호하는 종자회사가 주도권을 가진 상황에서, 농민들의 선택 폭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의 선택 폭도 제한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농과정에서 경험으로 그리고 지역사회 농민 공동체 안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자율적인 품종 선발 및 개량’ 과정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모든 축소와 소멸은 궁극적으로 다양성 훼손으로 가는 길이다.
 

종자-씨앗에 관한 문제는 특히 농민의 자가 채종 권리, 즉 ‘농부권’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뜨거운 논란거리다. 1998년, 몬산토 캐나다 지사는 유전자 변형된 유채 종자를 ‘불법으로’ 사용했다며 한 농민에게 4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그 유채의 특허권이 회사 측에 있다는 이유였다. 농민은 그런 요구를 거부했고 소송이 일어났다. 그 소송에서 끝내 패소한 고령 농민 슈마이저는 이런 말을 했다. “50년 동안이나 나는 내 밭에서 수확한 곡식 중에서 이듬해에 뿌릴 낟알을 미리 덜어냈습니다. 모름지기 농부란 자기 밭에서 얻은 낟알을 다시 심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 낟알들은 수천 년 동안 전 세계 농부들이 좋은 것을 추려서 보존한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법원은 이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농부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씨앗을 지키는 것은 농민의 자율성을 회복하려는 실천이다. 영농활동의 앞뒤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들이 농업 노동과정에서 재생산되지 않고 시장이나 국가 기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해가는 게 현실이다. 사실 종자뿐만 아니라 비료, 자재, 판로, 노동력 등 수많은 요소들이 농민이 자율성을 가지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육묘장에서 포트묘를 구입해서 정식하는 방식의 농사가 일반화되는 현실은 조만간 ‘호미의 골동품화’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토종자원 보전 다양한 실천 주목

지금 한국에서는 토종 자원을 지키려는 농민의 실천들이 작지만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토종 종자를 지키려는 농민의 운동은 농업(agriculture)이 더 이상 문화(culture)가 아니라 산업(industry)이기만 한 세상의 질서가 강요하는 단작(monoculture)의 흐름에 맞서며, 생태적인 혹은 유전자원(genetic resource)의 다양성을 보전하려는 노력일 테다. 일종의 공동생산, 즉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만남이라고 농업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과 살아 있는 자연(living nature)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자 상호 변형이 바로 농사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에 따라, 즉 ‘농사짓는 방식’에 따라 자연의 꼴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농사짓는 방식’이란 단지 영농기술(가령, 유기농업, 관행농업 등)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노동 조직 방식을 포함하여 복잡하고 광범위한 제도를 싸잡아 말하는 개념이다. 농민과 자연이 만나는 방식이 지속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적절한 균형이 가능해야 한다. 하나는 자연이 인간에게 충분한 생산량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자연이 재생산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점이다. 가급적 자연을 풍요롭게 하고 증진하며 다양하게 해야 한다. 토종 씨앗을 지키려는 농민의 실천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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