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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밀도 농촌의 사회적 경제, 경계를 허무는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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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19년 9월 5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시골에 갈 때마다 의문이 든다. 농촌 노인들은 목욕이며 이불 빨래를 어떻게 할까? 한 마을에 친구도 거의 없고 읍내에 나가봐야 학원도 없는 농촌 초등학생에게, 방과 후 일상은 어떤 시간일까? 농협에 볼 일 있어 나왔다가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며 앉은 할머니들은 지겹지 않을까? 이렇게도 사람이 없는데 면사무소 앞 구멍가게나 식당은 무슨 수로 장사를 하나? 학생 수가 50명도 안 되는 초등학교는 언제쯤 폐교될까? 갑자기 배탈 나면 약국을 찾아 얼마나 멀리 나가야 하나? 농촌 주민이 겪는 생활상의 문제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인구밀도 탓이다.


우라늄-235 1kg으로는 핵폭탄을 만들지 못한다. 소량의 핵분열 물질로는 연쇄반응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핵폭발을 일으키려면 최소한 몇 kg의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따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최소량을 임계량(critical mass)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시장이 작동할 수 있는 인구밀도 임계량이 분명히 존재한다. 최소 두께의 소비자층이 있어야 장사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런데 상당수의 농촌에서, 특히 면(面) 지역에서 인구밀도는 임계량 밑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장 실패가 일어날 때, 사람들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부문의 역할과 개입을 기대한다. 하지만 공공 부문마저 재정 효율성 등의 이유를 들어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서는 몸을 사린다. 학생 수가 60명 미만으로 줄면, 그 학교가 면에 하나 밖에 없든 말든, 지역사회에서 관계의 구심점 기능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폐교를 고려하라’는 통보가 빚 독촉장이라도 되는 양 날아든다. 보건소 등 농촌 의료의 일선에서 부족하나마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 있는데, 군대 가는 대신에 의료에 복무하는 공중보건의다. 그런데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생 중에 여학생 비중이 점점 높아져 머지않아 공중보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 판이다. 농촌 의료인력 부족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는 애 눈물 말려 소금 얻듯이 찔끔 마련한 대책이 ‘공중보건장학제도 시범사업’이다. 그러나 21년만에 부활시켰다는 이 사업의 실적은 초라하다. 전국에서 8명밖에 선정되지 않았단다.


교육이나 의료처럼 명백히 공공 부문의 책임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도 사정이 이러할진대, 목욕탕이나 세탁소나 식당이나 상점 등등의 문제로 들어가면 오죽할까? 시장 영역의 일에 공공 부문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생활의 필요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골 어르신들이 목욕할 곳 없으니 군청 직영 목욕탕을 만들고 공무원이 입욕표를 판매하면서 운영하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면사무소마다 길 건너편에 군청 직영 생필품 매장을 운영하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하지만 주민 생활의 문제를 놓고 시장 영역이라면서 공공 부문은 팔짱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 있어도 되는 걸까?


시장도 공공 부문도 실패하는 저밀도 농촌에서 대안(代案) 아닌 대안(對案)으로 제기되는 게 ‘사회적 경제’다. 연대와 협동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 협동조합 등 다양한 지역사회 조직을 만들고 키우며, 그 조직들이 경제 및 사회 활동의 그물망을 형성케 하자는 것이다. 주민이 조합원이 되어 식당이나 상점 협동조합을 운영하면 시장 작동의 임계량을 낮출 수 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에게 재화나 서비스를 원가로 공급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즉, 본전치기만 해도 되기 때문이다. 영리적 성격이 덜한 교통이나 복지 서비스 분야에서는 사회적 협동조합이나 여타의 사회적 경제 조직이 역할하게 하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공공 부문이 재정을 지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비효율적이어도) 공공 부문이 이미 하고 있거나 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재정 지원의 정당성은 충분하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조직을 만들어 큰돈을 벌자거나 일자리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자는 게 아니다. 시장도 정부도 해결사 노릇을 하지 못하지만, 농촌 주민의 필요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충족할 방도를 찾자는 말이다. 사실, 그런 사례들이 농촌에서 꾸준히 출현하고 있다. 전남 영광군 묘량면의 사회적 협동조합 ‘동락점빵’은 인구 2000명 아래로 쪼그라든 지역 주민에게 생필품을 공급한다. 전북 완주군이나 경북 상주시 등지에서 농사가 작아 기존의 농산물 판로에 접근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로컬푸드협동조합을 설립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전남 해남군 지역자활센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운영하기 어려운 쓰레기 재활용 처리장 사업을 군청으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한다. 자활사업 참여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쓰레기 재활용 처리장 운영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충남 홍성군에는 의료생활협동조합이 있어 농촌에 턱없이 부족한 의료서비스 접근 기회를 확보하는 일에 도전하고 있다.


농촌 지역사회를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재조직하려면, 먼저 시장과 공공을 나누는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주민의 자발성과 협동과 연대를 전제로,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경제 영역의 행위자처럼 비즈니스로 접근하지만, 주민의 필요를 해결하는 일이므로 공공 부문도 후원하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 의료, 문화, 상업, 농업 등 다양한 영역을 분절시키는 칸막이를 해체하는 일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민이든 공공기관이든 가릴 것 없이 연대와 협동을 직접 경험하면서 학습하고 가능성을 확인하는 실험과 실천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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