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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농사에서 전화농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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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0년 10월 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주장이 아니라면 무언가 말하기도 민망하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면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그리고 어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촌의 심각한 문제들이 전부 코로나19 때문에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다. 대부분 오랫동안 누적된 것들이다. 그 동안 풀지 못한 숙제, 방임한 과제들이 밑바닥에 쌓인 것을 놓고 미래를 논의하는 게 적절하다. 다만,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코로나19 사태를 핑계로, 외면했던 과거를 성찰할 수 있겠다. 강산이 한번 바뀐다는 삼십년, 농사는 어떻게 변했는가? 요약하자면, 삼십년 전에 ‘다방농사’가 등장했고, 지금은 ‘전화농사’가 유행이다.


농산물 시장개방 협상이 타결되고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한 1990년대 초반, 정부는 과감하게 농업정책을 펼쳤다. 이른바 ‘52조 원 농업구조개선 대책’이었다. ‘규모 확대’를 농정의 지상 과제로 삼았다. ‘대농에게 땅 몰아주기’, ‘묻지마식 유리온실 조성사업’ 등이 잔칫날 풍악 울리듯 요란했다. 그 무렵 ‘다방농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각종 농업정책 보조금이나 융자금을 얻으려고, 농업인들이 읍내 다방에 앉아서 농협 직원을 불러내 상담(혹은, 로비)하는 풍경이 흔했기 때문이다. 자금을 융통하는 것도 경영자의 능력이니 비난할 일은 아니겠다. 그러나 눈살 찌푸리며 탐탁치 않게 여긴 농민들이 많았다는 점을 곱씹어볼 만하다.


당시의 농정을 ‘생산주의 농정’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산출물과 생산성 증대에만 집중하는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집약적이고, 산업적으로 견인되며, 팽창주의적인 농업에 몰입하는 것’을 생산주의라고 한다. 지금은 어떠한가? 생산주의 농정의 퇴조는 완연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대농에게 땅 몰아주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후과(後果)는 크게 남았다.


지금 농촌에는 젊은 축에 속하는 소수의 ‘규모확대파’ 또는 ‘자본집약파’ 농업인이 있는데, ‘다방농사’의 후계자인 셈이다. 그리고 다수의 고령 소농도 있는데, 이들의 농사 스타일은 ‘전화농사’다. 젊을 때부터 ‘농작물은 농민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이치를 체감하며 부지런한 솜씨로 농사지었을 분들이, 이제는 늙어서 직접 손으로 할 수 있는 농작업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농기계를 들일 수도 없다. 영농 규모가 작아서 기계값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전화농사’다. 전화 걸어서 농기계 가진 이에게 모내기 작업과 가을철 수확 작업 전체를 맡긴다. 전화를 걸어야 농기계 가진 이가 와서 한 뙈기 밭 로터리를 쳐줄 것이고, 전화를 걸어야 삯일꾼을 구할 수 있다. 농민스럽지 않고 사장님스럽다는 이유로는 ‘다방농사’를 비난할 수 없듯, ‘전화농사’를 짓지 말라고 할 수 없다.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일 테니까.


‘다방농사’와 ‘전화농사’로 대별되는 농업인 계층 양극화, 이것이 지난 삼십 년 농업구조정책의 결과다. 물론, 이들만 있는 건 아니다. ‘농민-되기’를 희망하는 청년들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않다. ‘규모 확대’만을 유일한 농업경영 전략으로 스스로 배워 대뇌 전두엽에 기입한 ‘금수저 대농 승계 청장년 농업인’과 자본도 경험도 인간관계도 없이 시골에 와서 좌충우돌하는 ‘흙수저 삼무(三無) 귀농 청년 농업인’ 사이에, 농지를 두고 경합이 심하다. 대개는 금수저가 땅을 얻기 마련이어서, 경합이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는데 흘려 들을 일이 아니다. 특히, 그런 경합이 ‘자생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농업인 계층의 양극화가 스스로 동력을 얻어 심화되고 있다. 과거 생산주의 농정의 열매가 자가증식하는 꼴이다.


이렇게 흘러온 지난 삼십년 동안 놓친 것 중 가장 뼈아픈 것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농촌에 젊은 농민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국에 100만 농가 중 경영주 연령이 40세 미만인 농가가 1만도 되지 않는다. 농민 숫자가 줄어들면 생존자들은 대농이 될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이가 있던데, 대답 대신 그냥 웃고 말겠다. 앞으로 10년 뒤, 젊은 농민은 얼마나 있을까?


둘째는 자부심과 자율성을 몸에 새긴 젊은 농민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모가 물려주는 땅이라도 없다면, 스스로의 힘만으로 어느 정도의 농업자원을 형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농업소득 통계만 대충 짚어보아도 금세 알 수 있다. 농사 시작과 동시에 빚을 내야 할 판이고, 가능하면 보조금이라도 얻을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의존은 자율의 반댓말이다. 빚내고 신세지기 시작하면 고개 숙이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몇해 전 어느 영화배우가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말을 남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 말을 끌어다 쓰긴 했어도, 곤궁한 처지에 있는 영화예술인들의 자존감을 살려준 한마디였다.


역사적으로 농민은 거의 언제나 약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자율성과 자주성을 추구한 존재였다. 때로는 소규모 자작농보다 소작농이, 소작농보다 농업 노동자가 돈을 더 많이 버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나 소작농이기보다는 자작농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농민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고 말할 수 있는 젊은 농민은 얼마나 있을까?


셋째는 이웃과 연대하고 협동하면서 농촌 지역사회를 공동체답게 가꾸어 나갈 젊은 농민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넓은 들판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진 관개배수로, 마을 회관을 비롯하여 공동의 시설과 자산, 경관과 환경 등 어느 개인의 것은 아니되 농민-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고 관리해야 할 것들, 이른바 커먼즈(commons)가 농촌에는 여전히 많다. 커먼즈의 유지 및 관리가 농촌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는데, 연대와 협동이라는 공동의 규범을 바탕에 두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버릇을 몸에 익힌 젊은 농민은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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