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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팔아 돈 사던 시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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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박준기

한국일보 기고 | 2023년 2월 17일
박 준 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


돈을 상품처럼 사던 시절이 있었다. 돈으로 물건을 사면 모를까, 물건을 주고 돈을 사다니. 이해되는가? 나는 1970년대 어린 시절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가까운 오일장은 이웃 마을에 있었고, 더 큰 시장에 가려면 20리 길을 가야 했다. 어른들을 따라 길을 나서면서 듣게 된 얘기 중 하나가 '돈 사러 시장에 간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이 말을 무심코 흘려들었으나 세월이 흘러 이 말을 되새겨보니 뭔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돈을 주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한다. 이것이 돈의 교환 매매 기능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왜 농산물을 주고 돈을 샀을까? 여기에는 당시 인플레이션이 심했던 고물가시대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 하나는 소중한 농산물의 경제적 가치 상실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고물가시대에 현금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정성껏 생산한 농산물 역시 일시에 화폐로 교환하고 나면 그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수시로 오일장에 가서 돈을 산 이유는 농산물의 가치 상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농가 나름의 위험관리였다.


다른 하나는 돈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주기 위한 상품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농촌에서 농산물을 주고 돈을 산 이유는 주로 도시에 나가서 공부하는 자식들에게 송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농촌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방식 중 하나가 농산물을 주고 돈을 사는 행위였던 것이다.


요즘 고물가 우려가 크다.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해 금리를 인상하다 보니 경기는 활력을 잃고 있다. 농업도 금리 등 거시경제 변동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농업투입재 가격이 상승하고, 노임도 높아져 경영비의 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 반면, 쌀, 한우 등 농산물 가격은 오히려 하락해 농업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물가 상승을 우려하는 지금, 농업은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우려하는 역설(逆說)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농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졌지만 먹거리 공급자로서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농업이 버팀목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농업경영안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먼저, 농업인들이 소비 변화와 수급 상황 등 정보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경영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과거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에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농산물의 가치 하락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농가들은 판매 시점을 조절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다음으로 농업경영안정 지원제도를 점검해 봐야 한다. 다품목 생산 농가가 다수인 현실에서 개별 품목 단위의 가격 관리 방식이 적절한지, 규모화된 전업농가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평균적·획일적 지원정책이 바람직한지 살펴봐야 한다. 또한 농산물 가격 발견기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등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획기적인 정책 전환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농업에 대한 국민들의 진심 어린 관심이 필요하다. 돈을 사서 성심껏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농업이 이제 생산 주체, 시장, 역할 등에서 변혁기를 맞고 있다. 앞으로도 농업이 우리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적극적인 관심과 정성을 보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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