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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나눔터 6월호-KREI에 바란다] 농경연의 추억과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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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연의 추억과 기대

글. 허영구 전한국농촌경제연구원 노동조합 지부장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내가 농경연에 입원한 것이 1983년이니까 햇수로 34년 전이다. 노동운동 탓에 원하지 않게 연구원을 떠났던 2008년까지 25년 동안 농경연 소속이었다. 그 후 8년간은 농경연 지부가 속한 전국공공연구노조에서 활동했다. 작년 6월 비록 노조 주최였지만 연구원 강당에서 퇴임식을 했다.

연구원 옛 동료들이 과분한 축하를 해줬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행사와 저녁식사가 끝난 뒤 받은 선물과 꽃다발을 들고 나주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회기동 시절이 스쳐지나갔다.

농경연을 추억하면 붉은 벽돌 건물과 잔디밭, 그리고 건물 뒤 야트막한 산책로가 생각난다. 건강관리에 더 열심이었던 동료들은 점심시간에 경희대 교정까지 산책을 했다. KDI, 산업연구원, KIST와 주변 회기동의 모습이 선하다.

개인적으로 원장님의 주례로 연구원 강당에서 결혼식도 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농경연과 함께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토지경제실, 농업사실, 자원경제실에서 근무했다. 용역과제가 많은 지금과 달리 정책연구과제 중심으로 과제수가 적었던 시절인 데도 야근이 잦았다.

장기 수행과제였던 <농정40년사>, <농지개혁사>, <농지제도개선방안> 등의 과제에 참여하면서 연구사업을 익혔다. 초보 연구원이기도 했고, 자가용이 없던 시절 에는 퇴근 후 연구원 근처에서 종종 술자리도 함께 했다.

30년 전인 1987년 6.10민주화항쟁으로 한국사회는 대전환을 맞이했다. 그 해 12월 4일 농경연에도 노조가 설립됐다. 직장과 사회민주화 바람이 연구기관에도 불었다. 회계감사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시작한 노조활동이었는데 1999년 농경연 2대 위원장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당시 동료들과 1년씩 돌아가면서 위원장 하자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이제 정년을 넘겨 지킬 수 없게 됐다.

공부와 직장은 ‘농업경제’로 시작했는데 실제는 ‘노동경제’문제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농경연에서의 경험이 나의 삶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농민이나 시민단체분들을 만나면 농경연 출신이라는 데에 관심을 표시해 준다. 농경연의 연구결과가 보도되거나 연구원의 누군가가 인터뷰에 나올 때 하물며 언론에 승진 명단이라도 나오면 반갑다.

연구원 초기에는‘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농촌진흥청’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인들이 ‘농촌’과 ‘경제’의 조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홍릉 연구단지 합동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 중대장이 직장별로 줄을 세우면서 “KDI”, “산업”을 부른 다음에 “농촌에서 오신 분들”을 호명한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하지만 이제는 이름 그 자체로 농경연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내년이면 우리 연구원이 국립농업경제연구소에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으로 탈바꿈한 지 40년 되는 해이다. 지난 시간 동안 수많은 직원들이 거쳐 갔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고서도 만들어졌다. 구성원 모두의 각고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경연에 대한 비판과 더 나은 기대를 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세계화와 알파고 시대라지만 여전히 농업·농촌, 농민의 문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제임이 분명하다. 농민을 포함한 국민들이 농경연 직원들에게 부여한 역할을 다해야겠지만 농경연이라는 공간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삶도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40년을 앞둔 농경연의 더 나은 발전과 직원 여러분들의 건승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농경나눔터 2017년 6월호 – KREI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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