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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나눔터 3월호-농촌愛 살어리랏다] 고향마을로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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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로 귀농

 

. 이영수 경북 영천

 

11년 전 딱 이맘때 15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아내와 과감히 고향마을로 농사를 지으러 내려왔다. 평생 뼈빠지게 농사지어 대학교에 보낸 아들이 농사지으러 온다니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지실 일이었으리라.

 

아버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농사짓는 꼴을 못 보시겠다며, 정 농사를 짓고 싶다면 당신 눈에서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곳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밤 톨 같은 손자들의 재롱에도 아버지의 화는 좀처럼 누그러지시지 않으셨고 동네 창피하다며 집 밖 출입을 안 하셨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생전 몰아보지 않은 경운기로 논갈이를 했는데 물집이 잡히고 알이 베이고 저녁도 못먹고 파죽음이 되어 쓰러져 잠이 들어도 어떻게든 버텨야 된다는 생각으로 꼬박 닷새를 논을 갈았다. 추운 겨울 복숭아 전정을 배우다 밥술을 못 뜰 정도로 손아귀가 부었는데도 어떻게든 아버지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진땀 흘리며 밥을 먹기도 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호랑이 같던 아버지도 그만하면 농사지어서 처자식 굶기지는 않겠다는 한 마디로 농사꾼 아들을 인정하시고는 봄미나리가 돋던 6년 전 이맘때 눈을 감으셨다. 어설프기 짝이 없던 농사꾼도 이제 제법 자리를 잡아 고향마을에서 이장도 맡고 농장에 견학도 종종 온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새 지역에 귀농하는 젊은 친구들이 부쩍 늘었다. 10여년전만해도 귀농은 도시생활에 실패한 사람들이 낙향(落鄕)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 귀농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근 5년여는 면에서 내가 최고 막내였는데 지금은 같은 모임을 하는 친구와 후배들만 30여 명이 넘는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누구집 아들이 농사지으러 왔다는 말이 더 이상 흉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부모들은 아들 며느리에게 농사지으러 오라고 차도 사주고 아파트도 사주며 사정을 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로 며느리 좀 설득해달라며 우리 집으로 아들 내외를 데리고 오시는 어르신도 계시다.

 

물론 이 땅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게 만만치 않다. 귀농인뿐만 아니라 부단한 노력 끝에 자기분야에서 인정받는 프로 농사꾼이 되어도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상기후가 갈수록 빈번해지고, 어느 정도 안정적 기반을 다진 농민들도 나락 값이 폭락하면서 그나마 돈되는 몇몇 품종들로 쏠림현상이 생기면서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농사일 돕는 게 지긋지긋하고 농촌에 사는 게 싫어 고향을 떠났던 형님들이 근래에 마을일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고, 지나는 길이라며 농장에 들러 농사짓고 살만한 지 물어보는 걸 보면 농촌에 살고 농사짓는 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떤 직업과 직위를 가졌든 사람들은 오늘도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다. 행복의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고, 또 그 일 자체로 행복하면 축복이 아닐까?

 

나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복숭아나무를 지켜보는 일이 즐겁고, 내 손길 하나하나에 달라지는 결과가 보람되고, 저녁 무렵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며 일할 때의 행복감은 비교할 수 없다.

 

되돌아봐도 농촌에 살며 농사짓기로 한 우리 부부의 선택은 정말 잘 한 일이다. 농사 선배님들도 귀농 후배님들도 어떻게든 농촌에서 살아남아 이 행복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나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내 모든 힘을 보탤 것이다.

 

아부지, 저 이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맞죠?’

 

<농경나눔터 20183월호 농촌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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