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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나눔터 12월호-농정시선] 수제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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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의 기억

 

. 허장 선임연구위원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수시로 두 손이 악수하는 그림이 새겨진 밀가루 포대를 가져오셨고 어머니는 칼국수와 수제비를 끓이셨다. 밀가루 포대에는 가마솥에 밥 짓고 남은 누룽지를 말려서 넣고 두었다가 지겹도록 누룽지 밥을 먹었다. 어린 시절 수제비를 끓이려고 했던 뜨거운 물에 엎어져 얻은 화상은 내 팔에 남아 있다. 석유난로와 OPC 선풍기 하나로 여섯 식구가 보낸 겨울과 여름, 계란 하나 제대로 먹기 어려웠던 초등학교 시절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

 

농식품부가 국제농업 개발협력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시기에 즈음해서 15년 가까이 개발협력 관련 일을 전담하고 있다. 숨 가쁘게 돌아가고 스트레스를 듬뿍 안겨주는 정부위탁사업의 일상과 주기의 틈새 속에 때로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 지?”를 자문한다.

 

캄보디아의 시골. 건기에 물만 조금 공급하면 3모작도 가능한 땅에 우기에 벼농사, 건기에 마늘, 양파 등 양념채소 약간만 농사짓고 산다. 시장가격 폭등폭락에 불행한 우리네 농민보다 먹고 사는데 문제없어 행복해 보이는 농민에게 나는 가치사슬을 통 한 부가가치제고,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업농개발방향으로 얘기한다. 소농의 대 중간상인 가격협상력 제고를 위한 협동조합을 제안한다. 그러나 종자부터 가공 식품까지 밀려오는 중국, 태국, 베트남 산과 경쟁해서 잘 살아남을지는 나도 잘 모른다. 농산물 수집업자나 중간상인도 실은 영세한 오토바이 장사꾼일 뿐이다.

 

농촌개발 사업의 사후평가를 위해 마을대표와 이야기하는 동안 동그랗게 모여 우리를 관찰하던 아프리카 콩고의 주민 가운데 하나가 뜬금없이 자기가 맹장염에 걸려 수술하지 않으면 며칠 내로 죽을 것 같은데 병원비로 100달러를 달라고 한다. 그 말이 99퍼센트 거짓말인 것은 알지만, 헛간 같은 집 흙바닥에서 과거 우리네처럼 수제비라도 끓여낼 거리를 궁리해야 하는 이들 에게 5년이 걸리는 중장기 개발협력사업, 그것도 끝난 사업에 대한 평가는 관심 밖이다. 깨끗한 옷에 혈색 좋은 외국인으로부터 동정을 사서 농기구 하나 장만하는 게 더 급하다.

 

기성회비 980원을 내지 못해 조회시간에 이름이 불리고 엄청 쪽팔렸어도그 나름대로 나의 일상은 돌아갔고 때로는 행복했다. 1970년대 초 석유파동이 있었지만 방 하나에만 난로가 있었 으니 일가족이 석유는 때고 살았다. 그런데 우리 국내총생산(GDP)가 그때보다 600배 넘게 커진 오늘 부침하는 글로벌 경제에 완전히 포섭된 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진대 위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늘 불안하다.

개발협력사업 대상국은 모두 개발도상국이라고 부른다. 어느 방향으로의 개발이어야 하는 지는 각자 생각이 다르다. 1모작만 하는 캄보디아 농민이 개발협력 사업의 도움을 받아 경쟁을 뚫고 부가가치를 많이 얻어 행복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사업의 혜택을 받은 주민들 가운데에서도 소수에게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주민들의 역량을 높여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끈기 있게 도와주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갈 길은 먼데 힘 있는 고위공직자들 중 일부는 탁자 밑 돈에 굶주려 있고, 타성과 관료주의, 형식에 가려져 사업의 효과는 글쎄요이며, 지속가능성은 대체로 미흡이다. 원조의 과정만 중시하고 개발협력의 결과는 쳐다보는 이가 적다.

이제껏 가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길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무거워 진다. 국제농업 개발협력 관련 업무의 일상과 주기의 스트레스 속에서 가끔 들춰내는 내가 무 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지?”라는 질문은 미세먼지 뿌연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힘을 뺀다. 시장에서 이기기 위해 합심해서 중국산 배추와의 무한경쟁에 나서도록 응원하는 것이 유일한 처방전인지 고민한다. 개발협력 농정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타성과 형식에 빠지지 않게 나를 독려하는 화두로서는 지니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때보다 수제비를 먹을 수 있는 식당과 돈은 많아졌지만 그 수제비는 어머니의 수제비처럼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농경나눔터 201812월호 농정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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