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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헌법에 농업가치를 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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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유찬희
농민신문 기고 | 2018년 9월 21일
유 찬 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상황이 달라지면 내 생각도 바뀝니다.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경제학자 케인스가 자신이 말을 자주 바꾼다고 비판한 사람에게 응수한 말이라고 한다.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판단도 달라져야 한다. 헌법도 마찬가지다. 현행 헌법이 개정된 지 30년 이상이 지났다. 현행 헌법 내 농업·농촌 관련 조항도 오늘날 상황을 제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케인스의 말대로 헌법의 내용과 지향해야 할 바를 바꾸는 게 마땅하다.


헌법개정 논의 과정에서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헌법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놓고 다양한 목소리가 꾸준히 나왔다. 필자 나름대로 헌법개정을 할 때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왜 다원적 기능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오늘날 농업위기의 원인 중 하나를 사회가 농업부문에 요구하는 역할과 실제 농업부문이 제공하는 기능 사이의 간극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른바 개방화 시대 이후 이 차이가 커진 점이 원인일 수 있다고 본다.


지난 30여년 동안 국민이 농업부문에 요구하는 바가 달라졌다. 식량 생산이라는 본원적 기능을 넘어 친환경농산물(식품안전성), 농촌관광(쉼터), 귀농·귀촌(일터와 삶터), 사회적 농업, 로컬푸드 등 다양한 역할을 원하고 있다. 반면 농업부문이 실제로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 그리고 농정은 상대적으로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다원적 기능을 발현해 사회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것은 농업부문 관계자들의 책무이다.


다음으로 현재 농업부문이 다원적 기능을 충분히 발현하고 있다기보다는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미래 지향적인 뜻을 담는 게 정합하다. 농업부문이 그동안 사회에 많은 이바지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환경부하를 늘리고 식품안전성 문제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등 역기능도 발생시켰다. 농업부문 내부에서 역기능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를 토대로 앞으로 순기능을 늘리고 역기능을 줄이고자 하는데, 자체적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공공부문과 국민이 함께해달라는 논리로 접근해야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농업부문의 순기능이 크니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 아닌, 앞을 바라보고 투자를 해달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 농민의 삶의 질 향상과 함께 사회 전체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향을 지향한다는 내용을 담을 필요가 있다.


헌법은 국가의 최상위법으로 어떤 헌법을 가지느냐에 따라 농정방향이 달라진다. 스위스가 1996년 국민투표를 실시해 농업가치를 헌법에 담고 국가의 지원의무를 명시한 사례가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1995년 거의 비슷한 내용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사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년 새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1995년에는 농민단체 중심으로 발의했지만, 사안이 부결된 후 대안 집단 성격을 지닌 ‘중소농 보호연합’을 중심으로 결성한 ‘농민·소비자 연대 이니시어티브’가 소비자와 활발히 소통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나갔다.


이는 스위스 헌법에 농업가치가 담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스위스의 1996년 국민투표는 농업계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함께 참여해 국민 전체를 위한 농정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개헌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한국 농업 관계자들이 음미해볼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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