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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회의소의 조건, 토론과 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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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광남일보 기고 | 2022년 2월 16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방농정의 의사결정이란 지역의 농업과 관련해 어느 곳에 얼마나 공적 자금을 쓰고 무슨 제도나 지침을 고쳐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결정권은 대개 행정에 있다. 어떤 이는 행정이 주도하는 농정을 두고 ‘보조금을 내세워 농민 줄 세우는 농정’이라며 비판하는데 사실은 보조금 받는 그 줄에 끼지도 못하는 농민이 많다.


지난해에 전국 1640명의 농업인에게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농정과 관련해 체계적이고 시의적절하게 의견을 수렴한다’는 말에 동의한 긍정응답의 비율이 43.2%였다. 반면 ‘농업인이 기초 지방자치단체의 농업·농촌 정책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 비율은 83.6%로 집계됐다. 농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엿볼 수 있다. 시·군 농정에 농민이 지금보다 더 많이 더 깊게 관여해야 한다.


농민이 지방농정에 참여할 제도적 장치로는 어떤 게 있을까?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 근거한 지방 농정심의회가 있지만 실제로는 농업인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한다. 일 년에 몇 차례 형식적인 회의만 열릴 뿐이다. 심의회 위원도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위촉한다.


한편 전국 17개 시·군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는 농업회의소가 있다. 지방농정의 변화를 만들어 낸 곳도 있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지만 대체로 1000명 내외의 적지 않은 농민이 참여해 지방농정에 관해 의견을 모으고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농업회의소라는 공론장(公論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농업회의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읍·면순회간담회-분과위원회-농정협의회’로 이어지는 거의 9개월에 걸친 공론화 활동이다.


농한기인 1~3월 사이에 농업회의소 사무국과 임원들은 지역의 모든 읍·면사무소를 하나씩 날짜를 정해 순회한다. 농민이면 농업회의소 회원이든 아니든 그 순회간담회에 참석할 수 있다. 참석한 농민들은 시·군에 농정과 관련해 건의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발언할 수 있다.


이런 간담회는 수십 명에서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너 시간 정도 걸린다. 가슴 속에 품은 말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쏟아져 나온 의견을 농업회의소 사무국이 주제별로 정리해 농업회의소에 구성된 여러 분과의 분과위원들에게 넘긴다. 분과위원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역의 농민이자 농업회의소 회원이다. 분과는 지역 농업회의소마다 제각기 자율적으로 편성돼 있다.


분과위원회는 간담회에서 수집된 건의 내용을 토론해 시·군 농정과와 농업기술센터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보완한다. 즉 ‘우리 시·군에서는 이러저러한 농정 사업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공식 의견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전달받은 시·군의 농정 담당 공무원들은 자체로 검토해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밝혀 회신한다. 내년 예산이 시·군 의회에서 검토되기 전 초가을에, 농업회의소 임원과 시·군 농정 담당 과장 및 계장급 인사가 모여서 최종적으로 함께 협의한다. 이 자리에서 서로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을 조정한다.


평창군 농업회의소는 이런 활동을 8년 동안 꾸준하게 해냈다. 8년동안 총 888건의 건의사항을 농민들로부터 수집했고 그중에 농업회의소의 토론을 거쳐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한 정책 제안이 360건이었다. 그 가운데 행정이 수용해 농민들의 의견대로 실행한 정책 제안이 125건에 이른다. 그 밖에도 군의회에 의견을 제시해 조례를 제정케 한 것도 여러 건이다.


전국에 농업회의소는 아직 그 수가 많지 않고, 모든 농업회의소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방농정의 민주화를 선취하기 시작한 농업회의소를 여럿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법률적인 뒷받침이 없는데도 그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 힘은 농민들이 모여 지역농업의 문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데에서 나온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꽃보다 중요한 건 뿌리다. 민주주의의 뿌리는 무엇일까? 단연, 토론이다. 이런 활동을 장려하고 그 활동으로부터 형성되는 공론을 지방자치단체가 경청하도록 의무화하는 법률이 제정된다면 농업회의소는 지방농정 민주화를 이끄는 확고한 공론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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