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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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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의 문화 싹틔우는 농촌 사회적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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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광남일보 기고 | 2022년 4월 12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유례없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라는 찬사가 있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아픈 사회’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어느 사회학자는 여기에 ‘불안, 불만, 불신의 3불 사회’라고 이름 붙였다(이재열,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저임금과 신분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거나 실업 상태여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짓눌린 청년, 자녀에게 부모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에 경제적 불안과 역할 부재(不在)의 존재론적 불안을 겹쳐 체감하는 노인이 얼마나 많은가? 텔레비전에 보이는 타인의 풍요로운 소비생활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중산층으로 진입할 가망이 안 보이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불만은 얼마나 팽배한가? 이 모든 불안과 불만의 상황을 정치나 시장경제나 정부 기관이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으리라는 불신이 더해져 암울하다.


삼불 사회의 어두운 전망은 농촌에서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의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말에 ‘매우 동의한다’는 농촌 주민의 비율이 2013년에는 40%였던 것이 2020년에는 21%로 급감했다. ‘이웃을 매우 신뢰한다’는 응답 비율은 같은 기간 14%에서 9.5%로 낮아졌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농촌 주민 비율은 23.5%에서 37.2%로 상승했다. 사회적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는 협동도 연대도 어렵다. 그래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할 수밖에 없는 삶은 팍팍해지고, 불만과 불안이 쌓인다. 서로 이해하고 돕던 농촌 지역사회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활세계 수준의 불안에 직면하게 된다. 괜히 이렇게 된 건 아니다. 과거부터 작동해왔던 중요한 시스템들이 고장 나고 해체된 탓이 크다.


농촌에 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종래의 마을 공동체는 힘을 잃어 이웃끼리 서로의 생활을 돌보고 챙겨주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하려 해도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거나 돈이 없다. 심지어는 시장 자체가 사라진 농촌도 많다. 이웃에서도 시장에서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공공 부문은 탁상공론을 일삼거나 재정 효율성을 들먹이며 인구밀도 낮은 농촌의 문제에 미온적이기 일쑤다. 지금 농촌은 마을 공동체도, 시장도, 정부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시스템 실패의 진창’에 빠졌다. 그러나 완전히 실패했다고 인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2012년에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된 후 지금까지 전국에 2만개가 넘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협동조합이 생겨났다. 그 중 농촌에서 설립돼 활동하는 것이 5000개를 넘는다. 모두가 건실하지는 않겠지만 시장도 정부도 해결하지 못하는 농촌 생활의 여러 난경(難境)을 스스로 헤쳐나가려는 협동과 연대의 실천이 확산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노인 자살률 높기로 소문난 어느 농촌에서는 주민들이 노인 돌봄 문제를 해결하자며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다. 일년 동안 이불빨래 한 번 하기 어려운 어르신의 고충을 덜어드리자며 주민들이 ‘빨래방협의회’를 조직하고 세탁소 협동조합을 준비하는 곳도 있다. 시설이나 가정에 고립된 이웃의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치매 어르신을 불러내 만나고 함께 어울리는 농민들, 즉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는 농민이 늘어나고 있다. 농사가 작아 농산물을 팔 데가 없는 중소농들이 로컬푸드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례는 여럿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며 농촌의 척박한 교육 현실에 도전하는 마을교육공동체나 학교협동조합의 활동이 전국 농촌에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인구가 쪼그라들어 상점 하나 없는 농촌에서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생필품을 공급하(받)는 사례도 있다. 별것 아닌데도 혼자 사는 어르신은 할 수 없는 간단한 집수리, 읍내까지 모셔드리기, 반찬 챙겨드리기 등 잡다한 일을 도맡아 도와주는 사회적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농촌도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이 물결이 되고 파도가 되어 출렁인다. 협동과 연대의 가치를 내건 ‘사회적 경제’ 실천이 농촌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적 신뢰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 활활 타오르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정부, 지방자치단체, 관련 전문가, 농촌 주민 개인 등 모두에게 제출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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