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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농업의 이미지, 차이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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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정신문 기고 | 2023년 4월 23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흐름과 쌓인 것들이 미래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다고 믿는 현대인은 드물다. 미래는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아니라 개발하고 생산해야 할 제품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농업의 미래’라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명확한 선분과 정교한 곡선으로 그려낸 설계 도면에 맞추어 미래를 생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몇 가지 숫자와 그럴싸한 짐작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게 최선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그려낸 미래 농업의 이미지가 허술한 상상에 불과하다며 도외시할 수만은 없다. 조금만 덧칠하고 꾸미면 농업 정책이 근거할 미래 비전(vision)을 담은 청사진이라며 온갖 매체에 등장하고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으로 농업의 미래를 ‘생산’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정책은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가벼운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미래 농업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필요하다. 그런데 조용하다. 제출된 이미지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다. 인터넷에 접속해 ‘한국 농업의 미래상’이라는 말로 검색해 보시라. 또는 챗지피티(ChatGPT)에 “한국 농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라고 물어보시라. 하나의 미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스마트팜, 정밀농업, 디지털, 인공지능, 애그테크(AgTech) 등의 항들로 이루어진 계열이다. 농민들은 대부분 여기에 동의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팜’ 계열의 미래 전망 자체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전망이 제출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다른 이미지가 잘 안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농업의 미래를 논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사람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미래 디자인에 농민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 농업의 미래를 상상하려는 사람이 농민과 농업의 실제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거나 상상력이 얄팍하다는 것도 문제다. 공장에서 디자인팀이 생산팀의 하는 일이나 그 작업환경을 도무지 모른 채, 생산팀의 사정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제품을 설계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미래를 상상하기 전에, 농업을 변화시키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과거-현재의 이미지 계열을 보자. 유기농업, 환경농업, 친환경농업, 보전농업, 농생태학, 농업환경보전, 저탄소농업 등의 항으로 이루어진 계열은 한국 농업에서 50여년에 걸쳐 형성됐다. 직거래, 도농교류, 꾸러미, 농민장터, 로컬푸드, 도농상생, 친환경급식 등으로 이루어진 30년짜리 계열도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농업 변화의 역사적 계열을 찾아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농사짓는 ‘아무개’들의 고된 실천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 항들이 생성됐다는 사실이다.


딱 한 번만 농사짓고 끝낼 게 아니라면, 농업은 원래 반복이다. 지구의 공전 주기에 따라, 작물의 생육 주기나 가축의 성장주기에 따라 반복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농민은 평생 같은 일만 반복하므로 도대체 변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농업의 변화는 농민 아닌 사람들이나 농업 외부의 세계에 있는 우월한 지식, 기술, 돈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런데 농업은 ‘같음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임을 아는 이가, 농민 아닌 사람 중에는 그리 많지 않다. 신중하고 해방적인 농민의 상상력이 작년 농사와 올해 농사 사이에 미세한 차이를 만들고, 그런 ‘차이의 반복’을 통해 농업은 진보해왔다.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농업의 미래는 장사꾼이나 나 같은 서생(書生)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물론, ‘같음의 반복’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다. 한평생 날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길로 산책하기를 반복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차이의 반복’ 없는 상상은 공허하고, 상상 없는 ‘같음의 반복’은 맹목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과연 우리가 미래의 농업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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