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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나눔터 2월호-농촌에서 온 편지] 닭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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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서리

글. 최영호 충남 부여, KREI리포터

옛날 내 고향 시골에 있었던 마음속에만 묻어두기는 너무 아까운 추억의 옛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70년대 초반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가정이 어려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4-H 구락부를 조직해 농촌 계몽 운동과 더불어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면서 시골에 살고 있었다. 동네에는 나와 처지가 비슷한 일명 삼총사가 있었는데 우리 셋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뭉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총사는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 닭서리를 모의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닭서리 할 집은 당시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눈여겨본 우리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삼막굴’이라는 정씨 할아버지댁이었다. 인근 동네에서 닭서리를 하다가 탄로 날 경우 동네 망신이라 일부러 멀리 떨어진 동네를 택했다.

달이 없는 그믐께 한밤 중 삼총사는 그 집에 도착했다. 둘은 망을 보고, 나는 닭장 속에 기어들어가 닭을 잡기로 했다. 그런데 닭을 잡는 순간 닭들이 푸닥거리며 “꼬끼오”하고 우는소리에 그만 닭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망을 보던 친구들은 여유롭게 줄행랑을 쳤지만 나는 조그만 닭장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닭 주인에게 막대기 찜질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곤 나와는 상관없는 그전에 없어진 닭 값을 포함하여 쌀 2말에 합의를 하고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친척 형님 소개로 서울 구로 공단 양복점 직공으로 취직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양복 재단 기술을 배웠다. 몇 년 후에는 기술자가 되어 서울 봉천동에 일명 벌집이라는 곳에 전세방을 얻어 자취하며 서울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추석 때 정든 고향과 부모님이 그리워 고향에 갔다. 그때가 아마 스물다섯 살, 고향 역전에 내려 부모님 양말과 사과 한 줄 쇠고기 2근을 사서 들고 집에 오니 부모님이 얼굴을 부비며 반겨주셨다. 고향에 내려온 며칠 후 부모님이 기왕에 온 김에 참한 아가씨가 있으니 맞선을 보라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 취직한 총각이면 1등 신랑감, 1등 사윗감이었다.

곧이어 양가 부모님이 날짜를 잡아 상견례를 잡았고, 당일 나는 부모님을 따라 읍내 남향다방에 들어섰다. 다방에서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유행가가 애잔하게 흘러나왔다. 다방 한쪽에 아가씨와 부모님이 함께 앉아 있는데 아가씨 아버지를 본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아! 아저씨, 그때는 제가 철이 없어서, 너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그분이 바로 옛날 닭서리를 했던 그 집 주인 정씨 아저씨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와 정씨 아저씨는 둘도 없는 막걸리 친구 사이셨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사돈 맺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상견례를 한 것이다. 그 후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 정님이라는 그 아가씨와 몇 차례 연서를 주고받았고 그 이듬해 보리피리 불고 종달새 우는 봄날 결혼식을 하였다. 참, 인연도 묘한 인연이었다.

결혼식 후 나는 삭막한 도시보다는 고향 땅 농촌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서울 살림을 정리하여 시골로 내려와 지금까지 농촌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얼마나 지났나, 어느 날 장인어른과 약주를 한 잔씩 나누다가 장인어른께 슬며시 물어보았다.

“장인어른 그때는 작대기로 너무 세게 때리셨잖아요. 그리고 닭값도 너무 비싸게 받으시고, 사위한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장인어른은, “어험, 내가 뭘…. 다 지나간 얘기구먼, 아 이 사람아! 그 대신 우리 정님이 잘 키워서 자네 줬잖아! 그거면 됐지 으흠….”

<농경나눔터 2017년 2월호 - 농촌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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