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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공동체서비스 활성화법, 변화 계기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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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김정섭

농민신문 기고 | 2023년 8월 28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웃 마을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긴 화장실 문의 열쇠를 찾을 수 없단다. 화장실을 쓸 수 없어 곤란하니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이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114 전화안내에도 물어봤는데, 군(郡) 전체를 통틀어 열쇠·자물쇠를 고치는 업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방법을 찾아서 방문할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우선 옆집 화장실을 쓰시라고 어르신께 말씀드렸다.


이는 인구 3000여명의 한 면(面)에서 지난해부터 활동을 시작한 ‘홍반장 협동조합’의 소소한 일상 중 한 장면이다.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일에 나서기 때문에 ‘홍반장 협동조합’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이런 종류의 생활돌봄 협동조합이 한국 농촌에 30개 이상 있다.


전국 1169개의 면 지역사회 중 대부분이 인구 과소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다. 그동안 인구사회학적 쇠퇴와 더불어 세가지 실패가 드러났다. 첫째는 공동체 실패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동체, 즉 가족이나 마을에서 찾던 시절은 지났다. 가령 이웃과 함께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고인을 꽃상여로 모시는 마을은 신문에 날 정도로 드물다. 둘째는 시장 실패다. 약국·세탁소·목욕탕·미용실이 폐업하고, 음식점이나 상점이 아예 없는 곳도 많다. 대중교통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버스를 두세시간씩 기다리며 앉아 있는 노인들을 쉽게 목격한다. 셋째는 정부 실패다. 공공 부문도 효율성을 들먹이고 인구가 적은 농촌에는 인색하다. 농촌의 학교, 보육·공공의료기관은 늘 축소 또는 통폐합의 압박을 받는다.


사람이 부족해 9명으로 된 두 팀을 만들지 못한다면, 야구 경기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6명 두 팀으로도 게임이 성립되도록 말이다. 인구가 줄어도 일상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게임의 규칙을 변경해야 한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규칙을 바꾸려 애쓰는 사례를 찾을 수 있으리라. 농촌 주민들은 ‘마지막 상점’ ‘하나밖에 없는 음식점’ ‘노인 주간보호센터’ ‘간단한 집수리, 이동 지원, 이·미용 서비스 등의 생활서비스를 제공하는 홍반장 협동조합’ 등을 합심해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실천을 지원하는 정책사업도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역 서비스 공동체’ 지원사업이다. 이 사업은 ‘농촌 주민이 일상에 필요한 경제·사회 서비스 전반을 자발적 연대와 협력의 방식으로 제공하는 활동’을 지원한다고 밝히고 있다. 마침 국회에서 ‘농촌지역 공동체 기반 경제·사회 서비스 활성화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통과됐다. 법은 내년 8월 시행된다. 협동과 연대에 바탕을 둔 농촌 주민들의 실천을 공공 부문이 뒷받침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농촌 지역사회의 역량이 ‘1, 2, 4, 8…’로 이어지는 거듭제곱의 역량으로 증폭하기를 바란다.


물론 법 제정만으로 만사형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숙제가 있다. 첫째, 농촌 지방자치단체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주민들은 필요성을 느끼고 의지가 있지만, 물적·인적 자원이 부족하다. 공공 부문이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둘째, 주민은 민주적으로 의사결정하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지역사회의 주민 여럿이 협동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경(難境)을 맞이하기 쉽다. 직업·성별·나이·거주지가 다른 주민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경청하는 가운데 지역사회의 공공선(公共善)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 민관이 함께 애쓰는 줄탁동시(<5550>啄同時), 그리고 다양한 주민들이 지역사회 안에서 어우러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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