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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그런 척하면 그렇게 된다, 공동의 실천을 촉진하는 농업·농촌 정책

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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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5년 7월 8일
김 정 섭(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대략 3년 전 소문이 돌았다. 정부의 정책사업 명칭에 어떤 단어가 들어가면 예산이 삭감되거나, 심지어는 사업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저마다 가져다 붙이려고 애쓰는 유행어는 늘 있었다. 그런데 ‘금기어 목록’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해가 바뀌어서 살펴보니 과연 헛소문은 아니었다. 사회, 마을, 공동체, 자치 따위의 단어를 중앙정부 정책사업명에서 발견하기란 정말 어렵게 되었다. 사회적 기업 육성사업과 마을기업 육성사업 모두 60% 이상 예산이 삭감되었다.


흔히 ‘사회적 경제’라고 부르는 이 분야 정책에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같은 범주에 드는 ‘자활기업 지원사업’ 예산은 오히려 6% 증액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예산 규모가 작았던 ‘사회적 농업 활성화 지원사업’은 ‘돌봄 농업 활성화 지원사업’이라고 간판을 바꿔서 예산 삭감의 칼날을 겨우 피했다. 예산 당국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단어들’이었다.


이들 정책사업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대충 말하자면, 주민(시민)들의 집합적·자발적 실천을 활성화하려는 정책들이었다. 민주적 의사결정과 협동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방법(bottom-up approach)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누군가는 정말 싫어할 만한 정책이었겠다. 그런데 이 같은 ‘특정 어휘 혐오증’을 반(反)민주적 정권에서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넘겨버리고 안심해도 될까?


사실, 농민이나 농촌 주민의 공동 실천을 정책으로 지원하려는 기획은 오래전부터 무시당하거나 배척당한 적이 많다. 사람들의 집합적·자발적 실천 가능성을 신뢰하지 못하겠다거나 그런 실천이 중요한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전문가나 관료는 과거 정책 의사결정 과정의 곳곳에 포진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삭제된 어휘들이 곧 복원되리라고 낙관할 수 없는 이유다.


예를 들어보자. 문재인 정부 시절 2019년에 시작된 ‘농업환경 보전 프로그램 사업’은 개별 농업인이 아니라 마을의 농업인들이 함께 농경지와 그 주변 환경을 집합적으로 관리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른바 ‘공동활동’이라고 이름 붙인 환경·경관 관리 활동을 주민들이 함께 실천하면 그 비용을 보조금으로 일부 보상하는 정책이었다. 농업인들이 각자의 농경지에서 친환경농업을 수행하도록 현금을 지원하는 친환경농업 직불제 같은 정책의 한계를 뛰어넘는 측면이 있어서 농촌 현장에서 환영받았다.


농업환경은 단순히 농업인 개인들의 경지를 단순히 합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농로, 하천, 농경지 주변 생태계, 마을 공동체의 경관 등 내 것도 네 것도 아니어서 소유 관계가 모호하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용하는 곳이 대부분 농업환경이다. 각자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잘 관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각자의 것이 아니므로 관리도 공동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농업환경 보전 프로그램 사업이 환영받았던 것은 커먼즈(commons) 유지·재생산에 적절한 집합적·자발적 관리를 도모한 정책 설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관료들이나 전문가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해거리하듯 띄엄띄엄 시행되다가 사라졌다. 공익형 직불제가 정비되면서 ‘선택형 직불제’의 일부분으로 편입할 것처럼 알려졌지만, 2025년부터 시행된 약칭 ‘농업농촌공익직불법’에는 농민들의 집합적·자율적 환경 관리 같은 공익적 실천을 지원할 근거가 없다.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직불제라는 수단을 활용해 집합적이고 자발적인 농업환경 보전을 도모할 길이 막힌 것이다.


현재의 농업·농촌 정책이 전부 다 ‘공동의 실천’을 배격하고 있어 문제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농촌 주민 다수의 집합적 실천을 전제로 하는 정책은 과거에서부터 여럿 추진된 바 있으며, 근래에는 농촌 주민이 협동하여 일상생활에서 돌봄이 필요한 이웃 주민들을 돕도록 지원하는 ‘농촌 주민 생활돌봄 공동체 지원사업’이라는 것도 있다. 농업정책 중에도 최근에는 ‘공동영농’이라는 표현을 통해 집합적 실천을 강조하는 듯한 흐름이 생겨 일단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공동의 실천’이라는 지향은 여전히 정책 당국이나 학계의 여러 사람에게 외면당한다.


그 같은 외면, 무시, 배척의 논거는 뜻밖에도 간단하다. “농업인들이나 농촌 주민들이 공동으로 의논하고 일을 추진하는 역량이 부족해서, 지금은 추진하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또는 “현재 한국 농촌에서는 공동체가 심각하게 약화되어 집합적인 실천을 주문하는 정책의 효과성이 떨어진다”라는 것이다. ‘농촌에는 공동체 정신, 협동의 관행, 사회적 신뢰가 풍부하므로 그것을 활용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공동의 실천을 도모할 역량이 농촌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수량으로 측정하기는 어렵고 측정한들 쓸데없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공동의 실천을 촉진하자’고 주장하는가?


‘공동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농촌 지역사회는 주민들의 연결망(network)인 셈인데, 그 “연결망 안에서 연결들은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하고, 관련된 노동이 그 물질적 요소 중 하나를 구성한다. … 많은 공동체에는 관계들의 유지에 관한 노동 분업이 존재한다. … 상호작용에서 나오고 이후에는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다양한 연대감과 신뢰의 표현들은 이러한 배치들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 연대감의 표현들은 물론 언어를 포함하지만, 이 경우에는 말보다 행동이 더 효과적이다.”(《들뢰즈: 역사와 과학》, 마누엘 데란다, 2020, 33쪽). 간단히 말해서, 공동의 실천 역량은 공동의 노동을 통해 증진되는 것이며, 공동으로 노동하는 그 사람들이 공동체다.


농촌 지역사회는 정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공동의 실천이 끊임없이 시도되는 지역사회는 공동체스럽게 변모할 것이며, 공동의 실천을 포기한 지역사회는 원자화된 개인들(atomized individuals)이 우연히 모여 있는 무의미한 행정구역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대학원에 다니는 딸이 ‘공부를 재미있게 여기며 열심히 하는 대학원생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푸념하길래 말해주었다. “공부가 재미있는 척하면서 열심히 하면 재미있게 될 것이다.” 누군가 개인주의자인 척하며 살아가면 개인주의자가 될 것이다. 어느 농촌에서 사람들이 연대하고 협동하는 공동체인 척하며 공동으로 실천하면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런 척하면 그렇게 된다. 농업·농촌 정책은 ‘그런 척하는 실천’의 잠재력을 붙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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