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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규모화’라는 마지막 어휘와 작별하기

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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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5년 6월 10일
김 정 섭(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철학자 리처드 로티(R. Rorty)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 신념,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택하는 일련의 낱말들”을 일러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고 불렀다. 가령,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계엄을 저지하러 나섰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어휘는 ‘민주주의’였다. 순교자에게는 그가 믿는 초월적 존재의 이름이 ‘마지막 어휘’일 테다. 이처럼 ‘마지막 어휘’란 사람들이 끝내 버리지 못하고 의지하는 신념의 말이다.


한국의 농업정책 담론을 좌지우지하는 주류에게는, ‘규모화’가 ‘마지막 어휘’인 듯하다. 농업 규모화, 농민 한 명이 경작하는 농지의 면적을 확대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 농업에서 고질적 문제들의 뿌리는 블랙홀과도 같은 영세소농 구조”라는 단순한 지적, “농업-환경-먹거리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지속가능한 농정의 목표로 삼더라도 산업으로서 정체된 성장과 소농 구조의 심각성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라는 모호한 주장, “‘진짜 농민’ 개념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작은 농지를 갖고도 기술이 부족해서 각종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농사를 하거나 고령으로 인해 노동할 능력이 부족해서 주위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는 농민들”이라는 ‘진짜/가짜 갈라치기식’의 선동적 언설 등이 궁극적으로 근거하는 마지막 어휘는 ‘규모화’다.


그러나 ‘규모화’라는 그 말은 신통하지도 않은 늙은 점쟁이가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30년이 넘도록 으레 내놓는 낡은 부적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몇 가지 밝혀둔다.


첫째, ‘규모화론’은 농지를 규모화해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농민 한 명이 경작하는 농지가 커지면 그만큼 노동생산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토지생산성은 대체로 그대로이거나 약간 낮아진다. 투입할 노동력을 줄이는 대신 대형 농기계 등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물론, 규모화를 달성하면 통계자료에서 농가들의 평균 농업소득은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규모화론’이 자신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핵심 근거인데, 노동생산성이 높아져도 토지생산성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면 전체 사회에 농업 부문이 기여하는 경제적 부가가치의 총량은 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이는 드물다. 정부의 정책은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한 것 아니었던가?


둘째, 정책으로 추진하는 인위적 규모화는 필연적으로 어떤 농민들의 퇴출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퇴출당할 농민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농정의 범위를 산업정책에만 국한해 규모화를 촉진하고 퇴출당하는 농민들에게는 복지정책으로 대응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펴는 이들 중에 어떤 종류의 복지정책을 얼마나 펼쳐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바나나는 내가 먹을 테니 껍데기는 네가 치우라는 것 아닌가?


셋째, 농민 개인의 농지 소유권을 다른 농민 개인에게 이전하도록 촉진하는 방식의 규모화 정책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규모화 정책은, 특별히 조심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선택/배제의 논리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규모화 정책에서 탈락한 농민은 ‘가짜 농민’, ‘무임승차자’, ‘비효율적인 농민’, ‘당당하지 못한 자’, ‘전근대적 생산자’, ‘혁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농민’ 등으로 낙인찍힌 채 퇴출당한다. 가까스로 규모화라는 열차에 올라탄 농민은 ‘선도농업인’, ‘혁신적 경영자’, ‘근대적 생산자’, ‘생존자’ 등의 호칭을 얻겠지만, 그가 선 자리는 경쟁에서 지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설국열차일 뿐이다. 그 사회문화적 폐해는 심각할 게 뻔하다. 규모화론은 능력주의(meritocracy) 세상을 정당화하는 언설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따라 지위나 보상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정작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회학자 마이클 영(M. Young)은 능력주의가 결국 소수 엘리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탈락한 사람들을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사회로 이끈다고 경고했다. 현재 한국에서 순전히 본인의 능력, 특히 성실한 농업노동만으로 농지를 늘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운 좋게 정부 지원의 기회를 얻어 농지를 늘린 사람이 ‘자수성가’한 사람인 양 행세하면서, 다른 이들의 탈락을 두고 무능해서 생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농촌 사회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배리 스위처)간다는 능력주의 사회는 ‘흙은 땀 흘린 만큼 보답한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통용되는 농촌 사회와 거리가 멀다.


이렇게 규모화론을 비판했지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가령, 요즘 주목받는 경북 문경의 늘봄영농조합법인은 지역의 농업인들이 협력하여 나름대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냈다고 알려졌다. 나 역시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런 종류의 규모화는 선택/배제 또는 경쟁이 아닌 협동과 연대에 기초한 ‘집합적 규모화’인 듯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례를 두고 많은 사람이 ‘규모화’라는 결과에만 눈길을 둘 뿐 십수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힘들게 걸어온 협동의 과정은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 아쉽다. 조금은 갑작스레 ‘공동영농’이라는 말이 농업정책 문건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지역 수준에서 여러 농민이 협동적으로 생산하고 경영하는 과정을 강조하기보다는 자금 지원이나 규제 완화로 규모화를 이루겠다는 식의 단순한 발상에 머무는 듯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집합적 실천이 유래한 일본의 집락영농(혹은, 마을영농)이라는 말을 따오는 대신 공동영농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규모화론을 비판한다고 해서 소농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나는 ‘소농주의’와 ‘규모화론’이 적대하면서 서로의 성립을 뒷받침하는 기이한 틀(frame)을 형성했다고 의심하는 편이다.


1980년대의 농민층분해론과 1990년대의 농업구조개선론이 등장한 이후 수십 년 동안 ‘규모화’는 농업정책의 기조를 설명하는 열쇳말의 지위를 누렸다. 웬만한 농업정책 논의는 결국 ‘대농을 키울 것이냐, 소농을 지원할 것이냐’라는 식의 논쟁 구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적대적 공생’의 짝패 구조 내부에서 그 논리를 아무리 다투어도 떠날 수 없다. 기성의 어휘와 문체를 버려야 비로소 그 틀을 벗어날 수 있다.


규모화라는 마지막 어휘는 낡았다. 소농이라는 말도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낡은 언어로 말하면서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 바로 그 언어로 말하는 것을 합리성과 도덕성의 품질보증서로 여기는 사람들”(리처드 로티)로 남을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마지막 어휘’가 아니라 ‘새로운 어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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