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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도시 너머의 생명 공간

202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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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자
성주인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5년 12월 9일
성 주 인(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달 말 한국을 방문한 어느 일본 학자를 초청하여 연구원에서 작은 세미나 자리를 가졌다. 도쿄농업대에서 산림, 산촌, 지역사회를 주제로 오랜 기간 연구해온 미야바야시 명예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 몸담은 연구자 신분에 머물지 않고 농산촌 활성화를 위한 실천에도 적극 참여해온 학자로 평가된다.


그가 활동한 대표적인 무대가 바로 가와바무라라는 산촌지역이다. 도쿄에서 약 2시간 거리인 군마현 가와바무라는 도시민의 주요 방문 목적지이자 일본에서 손꼽히는 도농교류 거점시설인 ‘전원플라자’를 보유하고 있다. 도쿄 세타가야구와 40년 교류 역사를 이어오면서 최근에는 관계인구를 통한 지역 활성화 사례로도 소개되는 곳이다.


세미나 때 흥미를 끌었던 건 미야바야시 교수가 90만 인구의 도쿄 세타가야구와 산촌 마을 가와바무라의 관계 맺음을 ‘유역 연계’라는 이름으로 조명한 대목이었다. 여기서 유역은 강의 수원지이자 최상류인 가와바무라와 강 하류이자 연안에 위치한 도쿄를 아우르는 권역을 의미한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유역 개념보다는 더 광역적인 의미를 갖는다. 가와바무라와 같은 마을은 식량 생산 기능뿐 아니라 강의 원류(源流)인 산림을 보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기후 위기 시대에 강 하류에 위치한 대도시의 안전을 지키는 기능도 담당한다.


국토 공간상에서 농산촌과 도시의 기능적 연결 관계에 초점을 두어 미야바야시 교수가 주창하는 ‘유역권’ 개념이 아직 일본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자리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와바무라와 유사한 조건을 지닌 시정촌들이 모여 ‘전국원류협의회’라는 기구를 구성했을 정도로 유역권 논의가 일본에서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내륙부의 산간지대와 연안에 주요 대도시들이 분포하는 일본의 지리적 여건을 반영한 유역권 개념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배후 농촌의 역할을 거시적 관점에서 부각하는 호소력을 발휘하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시를 지탱하는 생명 공간으로서 농촌의 기능에 국가 정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네덜란드 란트스타트(Randstad) 도시권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위트레흐트 같은 네덜란드 주요 도시들이 띠를 이루어 분포하는 란트스타트 도시권은 8백만 인구를 지닌 초광역권 메가시티 사례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한다. 


란트스타트에서 도시들이 고리처럼 둘러싼 중심에는 네덜란드어로 ‘그로네 하트(Grone Hart)’, 영어로는 ‘그린 하트(Green Heart)’라고 불리는 녹지대이자 농업지역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 저지대에 위치한 주요 도시들로 연결되는 생태‧수자원 축들이 여기서 발원하며, 풍차 같은 고유의 유산들도 분포한다. 도시 확산을 억제하는 강력한 완충공간 역할도 한다. 그렇다고 비어 있기만 한 공간은 아니다. 식량 생산, 여가‧휴양, 치유 등의 다양한 활동들이 농업인을 비롯한 지역사회 주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도시의 생명을 뒷받침하는 네덜란드의 ‘녹색심장’ 기능을 담당하는 지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농촌정책 분야에 몸담은 전문가나 정책 담당자는 식량 공급, 환경‧경관 및 전통문화 보전, 여가‧휴양 기회 제공 같은 농촌의 기능들을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도시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곳이 농촌이라는 주장에 일본이나 네덜란드만큼의 힘이 실리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우리나라의 대도시 바깥에는 일본의 원류 지역이나 네덜란드의 그로네 하트 같이 도시를 지탱하는 공간보다는 ‘비도시지역’이나 ‘개발유보지역’ 같은 곳이 펼쳐져 있다는 인식이 그동안 우세했던 탓이다. 


대도시 바깥에 분포하는 농촌 공간을 도시와 이어진 생명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 필요한 때이다. 도시가 지탱하려면 인프라와 산업과 인구도 필요하지만, 외부의 농촌에서 제공되는 자연‧생태 기능과 농업활동, 여가공간 같은 것도 요구된다. 농촌은 더 이상 도시 너머의 공백 지대가 아니다. 도시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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