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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예쁜 말을 하지 말고, 쉽게 약속하지 말고, 경청하자
|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6년 1월 6일 |
| 김 정 섭(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새해 첫 글부터 현안을 논하기는 싫었다. 글을 쓰려고 궁리하던 중에 불쑥 떠오른 말이 있다. 오래전부터 농민들 사이에 떠도는 조언 아닌 조언이다.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거꾸로 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不信)을 진하게 드러낸다. 농정 당국과 농민 상호 간의 신뢰/불신 문제를 해설하는 두 종류의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농민 성향론’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박사, 교수, 공무원 중에는 ‘농민들은 원래 배운 게 적고 의심(疑心)이 많아 새롭고 진취적인 것에 호응하지 않으면서 보조금만 바라는 의존적 성향이 있다’라고, 사람 많은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관심법(觀心法)을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사석에서 만나 그런 말을 듣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둘째는 ‘정부 불신론’이라 할 만하다. 농민이 믿고 싶게끔 책임지는 마음으로 정부가 농정을 추진한 적이 있느냐고 말하는 농민들이 부지기수다. 첫째든 둘째든, 신뢰 혹은 불신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말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물론, 신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태이겠지만, 신뢰 자체를 마음의 문제로 놓고 다루어서는 신뢰를 형성하는 데 딱히 도움 될 것이 없다.
표심(票心)이라고 하듯, 재바른 정치인들은 합리(合理)로 대중을 설득하기보다 대중의 정동(情動)을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게 표를 모으는 데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합리적이지 않다’라는 부정적 평판을 감수하더라도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한다. 체계(system)에는 마음이 없다지만, 경직된 관료체계를 구성하는 공무원-관료들에게는 마음들이 있다. 그래서 굵직한 정책의 향방이 뚜렷한 근거 없이 하루아침에 선회하거나 실종되는 일이 잦다. 윗분이 바뀌거나 변심하면, 의문이 있어도 발설하지 않고, 윗분의 뜻에 맞추어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변침한다. 그래서 농정의 많은 약속은 합리적으로 검토한 결과가 아니라 정부의 고위층이든 일반 대중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도에서 나올 때가 많다. 그중에는 부실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다시 한번 농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신을 지핀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예 모르고서야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신뢰는 마음의 문제일 수 있지만, 마음을 어찌하는 방식으로 신뢰를 증진할 수는 없다. “신뢰는 약속의 긴 실천에 따른 눈에 띄지 않는 열매이며, 특히 자기 명령의 체계를 지며리 지켜나가는 일관성의 실효다. 신뢰는 심리적 내용의 잡박(雜駁)을 넘어서려는 형식적 의지의 표상이고, 제 나름의 실력이 쌓여 있다는 기별이며, 안팎으로 비용을 줄이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가장 효율적인 삶의 양식이다. 아는 대로 이것을 얻기란 지난지사이건만 잃기는 한순간이다.”(《한국적 교양의 실패와 여자들의 공부론》, 김영민, 25~26쪽). 신뢰를 쌓으려면 오랜 시간 일관된 행위를 통해 결과를 내보여야 한다. 이미 불신의 벽이 높다면, 그 ‘일관된 행위의 시간’은 그만큼 더 길어질 것이다.
신뢰는 마음이 아니라 실천으로 쌓는 것이라는 이치는 평이하지만 가볍지 않다. 약 30년 전 우루과이라운드가 진행되었다. 쌀 시장만큼은 개방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정부가 철회하는 순간 농정에 대한 신뢰가 절반쯤은 깎여 나갔을 것이다. 곧이어 유례없는 대규모 재원을 투입한다던 농업구조개선대책이 발표되었다. 그때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은 네덜란드식의 첨단 기술 농업만이 살길이라고 외쳤고, 적지 않은 재원을 들인 삐까번쩍한 유리온실이 수백 개 생겨났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존한 유리온실 경영체는 두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고, 농정에 대한 신뢰는 또 추락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칠레 FTA를 필두로 자유무역협정이 다발적으로 추진되었다. 한미 FTA 협상에서 그 국면이 절정에 이르렀다. 정부는 일종의 ‘피해 보상’ 성격으로 ‘상생기금’도 만들고 농정 예산도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농업ㆍ농촌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나중에 보상하겠다거나 투자하겠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굵직한 사건 외에 작은 농업ㆍ농촌 정책에서도 신뢰를 깎아 먹은 일은 숱하다. 현장에서 호응이 좋았던 정책이 뜻밖에도 후퇴하거나 폐지되고, 겉만 번지르르할 뿐 믿음이 가지 않는 정책이 돌발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2019년에 시작했던 ‘농업환경 보전 프로그램 사업’은 단순히 친환경 농업을 육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농경지 바깥의 농촌 생태환경과 주민이 사는 정주환경까지 주민들이 직접 보전하고 관리하도록 돕는 정책사업으로 현장에서 꽤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활동을 장려하며 대가를 지불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그냥 중단되고 사라졌다. 정권이 바뀌면서 새로 들어선 정권의 정책 기조에 따라 어떤 정책은 중단하고 다른 정책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새 정권의 정책 기조가 얼마나 타당하며, 그냥 폐기한 정책이 과연 어떤 연유로 그 정책 기조와 상충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정부의 ‘변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농정의 역사는 불신의 벽을 쌓아 올린 역사라고 말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듯하다. 농정 당국이 신뢰를 얻으려면 그 기간 30년만큼 무언가를 약속하고 꼬박꼬박 그 약속을 지킨 결과를 내놓아야 할 테다. 하지만 기대난망(期待難望)이다. 그래서 농정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오히려 ‘신뢰를 얻는 것’을 농정 목표의 상한선으로 삼고 뼈를 깎는 노력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뢰를 쌓으려면 농정을 어떻게 펼쳐야 할까? 첫째, 미사여구를 자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자신 없는 일은 일찍 포기해야 한다. 이 역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는 취지다. 성공할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정책사업이 문제인데, 이때 필요한 게 경청하는 미덕이다. 특히, 근거를 갖춘 쓴소리 듣기에 기민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비판을 청해서 들어야 한다. 셋째,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농민이나 농촌 주민 등 현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정책은 키우고 오래도록 추진해야 한다. 제대로 된 정책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 역시 경청하는 능력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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