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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비어가는 농촌 돌봄,‘부녀회장’의 무급 분투를 시민권으로 정당화할 때
|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6년 5월 29일 |
| 이 순 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새벽 4시, 고요한 어둠을 깨고 알람이 울리면 농촌 마을 부녀회장의 하루가 어김없이 시작된다. 자기 밭의 농사일을 서둘러 마치고 나면, 택배 송장을 인쇄해 우체국으로 농산물을 부치러 가야 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카트를 가득 채워 장을 본다. 마을회관으로 돌아와 수십 명의 어르신을 위한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일은 오롯이 부녀회원들의 몫이다.
오후에는 거동이 불편해 홀로 계신 어르신 가정을 방문해 안부를 묻고 도시락을 챙겨드린다. 해가 저문 뒤에도 가축을 돌보고 집안일을 마친 후에야, 내일 일손을 구하기 위해 인력 사무소에 전화를 돌리며 간신히 하루를 마감한다.
이 일과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인구 구조 변화를 가장 먼저 겪으며 소멸 위기에 놓인 농촌의 어느‘보통의 부녀회장’이 매일 마주하는 삶의 궤적이다.
현재 우리 농촌의 고령화율은 매우 심각하다. 국가데이터처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2024년에 총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는데, 농촌은 15년 전인 2010년에 이미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2025년 농촌의 고령화 비율은 30.4%(도시 19.3%), 그중에서도 돌봄 수요가 본격적으로 증가는 80세 이상 후기 고령자 비율은 8.4%로 도시 4.2%보다 두 배 많다.
더 큰 문제는 돌봄 사각지대다.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혼자서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농촌 노인의 비율은 2020년 12.6%에서 2023년 18.4%로 증가하였는데, 이중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노인이 47.7%나 된다. 이처럼 비어가는 농촌의 공적 보건·의료와 돌봄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마을의 여성농업인과 부녀회 조직이다.
단순한 무급 봉사가 아닌 ‘참여 시민권’ 과 ‘정의’ 의 실현
그동안 우리 사회와 지방 행정은 농촌 여성들의 이러한 헌신을 이웃 사랑이나 부락 봉사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며 당연시해왔다. 하지만 정당한 보상과 사회적 인정이 결여된 무급 봉사 중심의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여성들에게 돌봄 부담이 집중될 경우, 결국 신체적·정신적 번아웃과 지역 이탈이라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농촌 여성의 지역사회 돌봄과 공동체 유지 활동은 시혜적인 봉사가 아니라, 주체적 권리이자 공동체의 가치를 생산하는 ‘참여 시민권(Citizenship as Agency)’ 의 실현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농촌 여성들은 매일 밥을 짓고 노인을 돌보며 시민권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행위 주체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공익적 기여에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노동 시장의 임금을 주는 차원을 넘어, 권리 행사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보증’ 이 되어야 한다. 농촌여성의 돌봄 노동 가치를 공식적으로 공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동등한 사회적 주체로서‘참여의 평등’을 누리게 하는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대안으로서의 ‘공익활동 기여제’ 와 지역 경제의 선순환
정부의 국정 기조인 기본사회와 보편적 서비스 보장 흐름에 발맞추어, 실질적인 보상 체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 한 가지 방안으로 ‘공익활동 기여제’ 를 고려할 수 있다.
이는 마을 공동 급식, 아이 및 노인 돌봄, 경관 관리, 마을 환경 정비 등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는 다양한 일상 활동들의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여 인증하고 보상하는 제도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공공 서비스 영역의 일자리 확충과 생산적 공공 일자리 발굴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공 서비스 일자리와 같이 국가가 재원을 투입해 사회적 편익을 확보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 예산 낭비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재정 집행임을 강조하였다. 공익활동 기여제는 바로 이러한 철학을 농촌 사회서비스에 구현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
재원과 보상이 잠재적 여성 활동가들의 손으로 흐르면, 그들이 생산한 유연한 돌봄 서비스가 배후마을 취약 주민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이제 농촌여성의 비가시적인 무급 돌봄 노동을 사회적으로 승인해야 할 때다. 그들의 헌신에 걸맞은 정당한 인정과 물질적 보증이 제도화될 때, 농촌여성들은 당당한 시민권의 주체이자 전문적 활동가로서 자부심을 품게 될 것이다.
비어가는 농촌을 다시금 사람 온기가 도는 따뜻한 상생의 공간으로 만드는 첫걸음은, 매일 새벽 마당을 쓸고 가마솥 불을 지피는 우리 부녀회장님들의 소중한 손길에 국가가 정당한 가치를 매기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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