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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양파가 불쌍하잖아”… 여성농업인의 생태적 서사에 응답해야

202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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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이순미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6년 7월 24일
이 순 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의 한복판에서 우리 농업은 피해 지원에서‘기후 위기 적응’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절박한 기로에 서 있다. 이 거대한 전환 앞에서, 어느 농촌 정책 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가 내내 잊혀지질 않는다. 양파 가격이 폭락해 수확조차 포기해야 했던 해, 평생 양파 농사를 지어온 한 할머니의 인터뷰 일화다. “양파 농사 그만두고, 다른 돈 되는 농사를 지을 생각은 안 하셨느냐” 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반평생 양파 농사를 했는데, 나까지 그만두면 양파가 불쌍하잖아.”

 

토론회 발표자는 할머니의 이 말씀이, 여성농업인이 이미 인간 중심의 이익 계산에서 벗어나 자연과 땅, 작물을 동등한 생명의 동반자로 바라보는 ‘다종 공거(Multispecies Conviviality)’ 의 관점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하였다.

 

많은 생태학자와 농촌 사회학자들은, 여성을 돌봄의 주체로 간주하고 소규모 영농이나 텃밭 경작자로 주로 인식해 온 전통적인 농업생산구조가, 역설적이게도 여성농업인들에게 높은 친환경 및 생태주의 수용성을 깊이 각인시켰다고 분석한다. 대형 농기계를 부리고 화학 비료와 농약을 투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대규모 단일 작물 재배 방식에서 한 발 비껴나 있었던 덕분이다. 

 

그 결과, 농업 생산에서의 소외와 주변화로 여겨졌던 이 역사는 오히려 여성농업인을 기후 정의와 생태농업의 진정한 주체로 길러내는 토양이 되었다. 적은 경작 규모, 자연에 해를 덜 입히는 저투입 농법, 가족의 밥상을 채우는 자급자족적 농사, 소소한 직거래, 그리고 마을 공동체와 농촌 환경을 살피는 돌봄 활동의 행위들은 기후 위기나 생태농업이라는 담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여성농업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자 문화로 존재해 왔다. 

 

따라서 기후위기 적응 정책의 핵심 동력은 오랜 세월 생태적 삶을 유지해 온 여성농업인의 농사짓기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장하고 촉진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여성농업인의 환경적 기여를 명확히 인정하고 이들의 기후 적응 실천을 고무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을 위한 최우선 과제다.

 

안타깝게도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정책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단적인 예로, 저탄소 농업기술을 적용하여 온실가스를 감축하면 감축량 1톤당 1만 원을 지급함으로써 농업인의 온실가스 감축 활동을 지원하는 ‘농업·농촌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사업’ 은 농업경영체의 경영주를 대상으로 설계되어 있다.

 

여성이 농약 대신 손으로 김을 매고 토종 종자를 지키며 저탄소 농법을 실천하더라도 인정과 보상은 남성경영주에게 돌아가는 구조이다. 이제는 여성농업인을 기후 위기의 수동적인 피해자나 영농보조자로 보지 않고, 기후 적응을 이끌어갈 주체적인 생산자로 조직화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기후 적응 정책을 실천 기반으로 혁신하여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가구 단위나 경영주 중심의 지원 방식에서 탈피하여, 개별 농업인의 실질적 실천 행위에 기반한 보상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친환경 저탄소 농법을 실천하거나 토종 종자를 보존하는 여성농업인과 그 공동체에 직접적인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는 '탄소 적응 마일리지'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생태농업을 실천하는 여성농업인 생산공동체를 통한 기후 적응 모델을 육성해야 한다. 마을 단위 여성농업인 공동체를 생태농업의 거점으로 조직화하고, 이들이 주도하는 직거래 및 로컬푸드 체계를 지원하는 여성 공동체 단위의 기후 적응 실천 프로그램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여성농업인의 신체적 특성과 안전을 고려한‘기후 안심 작업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 여성의 신체 조건과 근력에 최적화된 경량 스마트 농기계 및 기후 적응형 편이장비를 상향식으로 개발하여 우선 보급해야 한다.

 

더불어, 뙤약볕 아래서의 온열질환을 막기 위해 농지 인근에 간이 화장실과 그늘막을 갖춘 '기후 쉼터' 설치를 제도화하고 공간 계획에 의무적으로 반영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양파가 불쌍하다” 며 작물의 안위를 걱정하던 농심(農心) 속에 이미 우리가 찾던 기후 위기의 해답이 들어 있다. 생산 논리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여성농업인의 생태적 실천을 농정의 중심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들의 실천을 촉진하고 정당하게 보상하는 기후 적응 정치를 시작할 때, 비로소 위기에 처한 우리 농업과 지구가 지속 가능한 내일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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