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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초고령 농촌의 ‘삶의 주도성’을 깨우는 생활돌봄 공동체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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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이순미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6년 7월 24일
이 순 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국적인 감동과 화제를 모았던 전남 해남군 화산면의 ‘꽃메합창단’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무대에 오른 여성 노인들은 농사용 작업복인 ‘몸빼 바지’나 획일화된 한복 대신, 화사하고 고운 드레스를 색색별로 차려입고 당당히 노래했다.

 

“우리 공연복이 다섯 벌이나 돼요”라며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여가 활동의 재능 뽐내기 그 이상의 감동 서사를 보여 주였다. 평생을 가족과 농사일에 헌신하느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농촌 여성 노인들이, 무대 위에서 자기 삶의 중심이자 당당한 주인공으로 활짝 피어난 순간이었다. 

 

흔히 농촌 노인을 ‘결핍된 존재’, ‘젊고 역량 있는 사람들이 돌봐주어야 하는 수혜자’로 바라본다. 그러나 농촌 현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진짜 갈증은 단순히 끼니용 반찬이나 쌀 몇 포대를 보충받는 물질적 구호에 머물지 않는다.

 

방송에 출연한 해남 화산면의 주민자치 리더들이 지적했듯이, 냉장고를 열어보면 먹을거리가 부족하지 않고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어르신들도 많다. 이들에게 정말 결핍되었던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적 경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는 자존감, 그리고 주체적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자율성’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에 조사한 「농어촌 노인 인권 실태조사」 결과는 그동안 우리 농촌 노인, 특히 여성 노인들이 처해 있던 무기력하고 의존적인 삶의 그늘을 아프게 보여준다. 가부장적 질서가 뿌리 깊은 농촌에서 여성 노인은 평생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 왔다.

 

삶의 중대한 결정에서 본인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비율(65.6%)은 남성 노인(86.9%)보다 현저히 낮았고, 의사결정을 자녀에게 맡기는 비율 역시 남성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주관적 건강 상태와 삶의 만족도도 낮고 우울감도 남성 노인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주민이 주도하는 생활돌봄 공동체는 이 무기력의 사슬을 끊어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돌봄의 방향이 일방적인 ‘시혜’에서 상호적인 ‘시민적 참여’로 전환될 때 노인들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온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생활돌봄 공동체인 ‘더불어해봄 사회적협동조합’이 지역 종교단체와 협력하여 운영하는 노인교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의 어르신들은 원예 수업에서 손수 만든 화분을 자녀에게 자랑하고, 자녀가 건넨 용돈을 다시 쥐고 와 동료 어르신들을 위한 간식비로 선뜻 내놓는다. 늘 도움을 받기만 하던 존재에서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주체로 변화한 것이다.

 

특히 결석 한 번 없던 한 동료 어르신의 부고를 계기로 수업 중 자연스럽게 나눈 죽음 이야기는, 피해야 할 금기가 아니라 “내 삶을 어떻게 존엄하게 마무리하고 잘 정리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배움의 장이 되었다. 거울 만들기 수업은, 평생 고생하느라 쭈글쭈글해진 자신을 마주하며 오열하다가도 “살아오느라 참 애썼다”며 자기 자신을 축복하고 보듬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해남군 화산면의 꽃메협동조합도 마찬가지다. 주민자치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생활돌봄 공간은 행정이나 서비스 공급자의 공간이 아닌 ‘주민들의 공간’이다. 80대 여성 노인들이 스스로 빵집의 공장장, 영업부장, 반장 역할을 맡아 “그동안 마을과 이웃에게 받은 게 너무 많으니 나도 돌려주고 싶다”며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선다. 수혜자가 곧 활동가가 되고, 돌봄을 받던 주민이 다른 이웃의 안부를 챙기는 지역사회의 든든한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초고령화된 농촌에 사람도 없고 역량도 부족하여 주민 주도 돌봄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농촌 주민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공급자 중심의 편견에 불과하다. 농촌 노인들은 무기력하게 누군가의 보살핌만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인생의 풍부한 지혜와 시간이 있고,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초고령 농촌의 복지는 일방적인 퍼주기식 전달 체계를 넘어, 어르신들이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지닌 지역 시민으로 우뚝 서도록 돕는 자치와 ‘역능화(Empowerment)’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농촌 노인, 특히 여성 노인들이 삶의 주인으로 당당히 설 때, 소멸을 걱정하는 우리 농촌의 미래도 비로소 지속 가능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끊어졌던 관계망을 다시 잇고 주민들을 자율적 삶의 주인으로 세우는 데 일조하는 ‘농촌 주민 생활돌봄 공동체’는 그 성과와 의의가 매우 크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이와 같은 생활돌봄 공동체가 더 많이 결성되고 운영될 수 있도록 정책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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