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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I논단

긁혔다

2026.10.14
162
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기고자
김정섭

한국농어민신문 기고 | 2026년 10월 13일
김 정 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누군가 생각없이 툭 던진 말이어도, 그것이 내 존재 이유를 무시한다 싶으면 ‘긁힌다’. 농과대학 교수를 만나 잡담하던 중에 ‘국책연구기관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정부 예산으로 설립해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은 정책 연구를 할 때 정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 연구를 독점하고 있어서 새롭고 창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연구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일리가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거나 완전히 잘못된 진단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라는 국책연구기관에서 20년째 일하는 나는 긁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 없앨 거면 내가 퇴직한 다음에 없애라.”라며 농담으로 응수했지만, 마음이 상했다. 논리를 떠나서, 가벼운 말로 내가 먹고사는 밑바탕인 직장의 존재 이유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한국 농업의 연간 총생산액이 삼성전자 한 해 영업이익의 절반쯤밖에 되지 않는다. 대학교육 정책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고 상상해보자. 국민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몫은 미미한데 국립 농과대학들의 교수 숫자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며, 농대의 교육과 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하고 반도체나 인공지능 분야 지원을 늘리는 ‘선택과 집중’을 정책 방향으로 삼자고 누군가 주장한다. 이 말을 들은 농과대학 교수들은 뭐라고 할까? 맞긴 맞는 말인데, 자신이 퇴직한 후에나 그렇게 하라고 말할까?

 

아마도 한국에서 농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려 나설 것이다. 식량 안보와 국민 건강이 중요하다, 농업이 있어야 아름다운 농촌 경관과 농업 유산이 보전된다, 논농사가 발휘하는 홍수 예방 효과를 돈으로 환산하면 44조 원이다, 농사가 유지되어야 농촌 지역 공동체도 유지된다, 농업은 발전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생명산업의 근간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업이야말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고 가르치는 데 농업만큼 유익한 소재도 없다, 농촌은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에 찌든 도시민들이 편안히 쉬고 심신을 재충전할 수 있는 곳이다, 등등. 농업의 존재 이유를 수십 가지는 들고 나올 것 같다. 농과대학의 존재 이유는 농업의 존재 이유에 딸려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난 농업계 신문사 기자가 농산물 유통업 종사자들의 모임에서 들은 말을 전해 주었다. 영세소농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옮기면, “한국은 ‘소농 하기’에 참 좋은 나라”라는 빈정거림이었다고 한다. 작게 농사짓는 농민들 앞이라면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테다. 누군가의 존재 이유를 면전에서 부정하면, 상대가 긁혀서 멱살을 잡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건 상식일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공론장에서 누군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몰지각한 발언이 너무 쉽게 발설된다는 점이다. 수년 전 ‘농업ㆍ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에 규정된 농업인 기준을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다른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요즘도 그런 토론회가 열린다고 한다. 대략 300평, 즉 1000제곱미터 이상의 면적에서 농사지어야 법률로 ‘농업인’이라고 인정하는 기준이 너무 느슨하다는 주장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법률상 존재 이유를 인정하는 경지면적 기준을 상향하자는 주장은 새로운 게 아니다. 작게 농사지으면 평균 농업소득을 깎아 먹고 대한민국 농업 발전의 걸림돌이 될 뿐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 이후로 형성된 낯익은 도그마다. 이 나라 농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또는 농업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평균 농업소득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재배면적이 클수록 매출액, 즉 조수입이 많고 농업소득도 높아질 테니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다.

 

영세소농은 생존하거나 발전할 가능성이 낮은데도 계속 농사짓고 있어서 규모를 확대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다른 농업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주장도 있다. 작게 농사짓는 사람에게 소농직불금을 주지 않았다면 벌써 은퇴했을 농민이 여전히 농사짓고 있고, 그것이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법적 농업인 지위를 박탈하면 직불금이나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퇴출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야 나오게 될 농지를 ‘선도농업인 호소인’들이 활용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앞에서 언급한 가상 상황에서 제시한 한국 농업의 숱한 존재 이유를 지탱함에 있어, 영세소농이 무능하다거나 태만하다는 근거는 없다. 평균 농업소득이 얼마이든 간에, 농민 개인이 숙명이든 선택이든 자기 농사를 지으며 살림살이를 꾸려가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즉, 농사짓는 농민의 존재 이유와 논밭의 크기는 깨끗하게 무관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려 ‘기본법’이 인정하는 존재 이유를 부정당하고 퇴출 대상으로 지목된 농민들이 “당신은 작고 도움이 안 되니 사라져 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래에 한국 농업의 발전을 이루려면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며,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무신경하게 내뱉는 ‘선택과 집중’, 그 말의 진짜 뜻은 ‘선택과 배제’다. 어떤 대상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대상은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런 토론회 자리에서 누군가를 선택하고 누군가를 배제할 권리나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없다. 물론, 그저 개인의 의견을 말한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토론장에 불려나와 그런 말을 해도 된다는 발언권은 어떻게 얻었는가? 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박사이기 때문에, 교수이기 때문에, 관련된 단체의 간부이기 때문에, 이른바 전문가이기 때문에 발언권을 얻은 것이다. 온당한 일일까?

 

진심으로 한국 농업의 미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어떤 농민들의 존재 이유가 법률로 무시당하는 미래이며, 정부의 자원 배분에서 불공평하게 배제당하는 미래다. 인정과 무시는 사적인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도 근본적인 문제다.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맹자가 말했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은, 그것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을 지경이라 해도, 모욕적으로 소리치면서 주면 길 가는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걸인조차 달가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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